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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Nov 25. 2023

우리의 새벽 1

소바의 새벽

    동트기 두세 시간 전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간다. 병기는 가게로, 나는 식탁으로. 나는 더 이상 외풍이 들지 않는 집에 앉아 노트북을 열거나 책을 펼친다. 차라도 끓일까 주전자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물 끓이는 소리에 아이가 깨어 놀아달라 보챌까 겁이 나서다. 아이들은 대게 어린이집에 갈 시간까지 잠을 잔다. 아이들의 기상은 내게 마감과 같다. 한계이자 제한된 시간이 주는 효율성이다.

    정수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가능한 나지 않게 잔을 기울여서 물을 따른 뒤 홀짝홀짝 마시며 책을 펼친다. 어느 미국 여성 작가의 에세이, 한 줄 한 줄 읽으며 그의 통찰과 세련되고 섬세한 표현력에 소리 내어 감탄한다. 한 챕터를 읽고 나서 노트북을 열고 자판을 두드린다. 써질 때도 있고 안 써질 때도 있다. 안 써질 때는 그래도 써 놓은 한 두줄을 반복해서 읽으며 이거라도 썼다 위안 삼는다.

    마케팅이나 경영에 관한 책도 식탁 옆 작은 트레이 위에 두 세권 가량 꽂혀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그런 책을 집어든다(최근 일주일은 글쓰기 책만 읽은 것 같지만). 그런 책을 읽은 날에는 할 일이 부쩍 늘어난다. 지금 하고 있는 걸론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더 해야 해! 빨리 해야 해! 그러면 다음 날은 글을 쓴다. ‘정말 해야 해?’라고 내게 묻는다. 많은 해야 할 일 중 몇 가지가 남는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고 필요한 일이다.


    아이들이 어려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던 시절에 내게 여유는 없었다. 세상은 내가 그런 상황이라는 걸 괘념치 않고 계속해서 시련들을 보내왔다.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 둘이 있었고, 멋 모르고 벌여 놓은 공동체 사업이 내 가슴과 통장에 큰 구멍을 뚫어 놓았고, 새로 이사한 시골집의 살을 에는 외풍은 내 인생 최악의 비염과 원인 모를 통증을 발생시켰다. 스파르타식 훈련을 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다. 도망칠 수 없었다. 하소연하고 화내고 욕하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병기에게 했다(그도 사업에 함께였다). 매일 저녁을 인스턴트로 대충 차려놓고 먹는 둥 마는 둥 속에 담긴 걸 쏟아냈다. 밥을 먹다 말고 사업 동료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가 한 시간 뒤에 씩씩대며 돌아오곤 했다. 분노의 에너지는 컸고 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졌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들이 보였다. 스파게티 소스로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 두 눈을 꿈뻑이며 나를 바라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들. 죄책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내가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부모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니 괴로웠다. 화를 내는 엄마라니, 다른 사람 험담을 하는 엄마라니, 인스턴트 소스를 뿌린 파스타를 매일 저녁으로 주는 엄마라니! 한심하고 한심하고 한심하다. 그런데 어쩌겠어, 나도 살아보겠다고 이러는 거야.

    그날 나는 모두들 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목청껏 울었다. 덩달아 아이들도 울었다. 온 얼굴이 빨개진 아이들이 내달렸고 우리는 한데 포개어졌다. 병기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파게티 소스와 눈물이 만든 거대한 웅덩이에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얼음이 어는 한겨울에 새벽장에 나가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살아야 하니까. 나도 그런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나는 외투와 담요와 이불을 둘렀다. 빨개진 코에서는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아이들이 깨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데리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재웠다.

    글을 쓰며 울고 웃었다 절망하고 감격했다. 같은 이야기라도 말로 할 때는 투정뿐이었는데 글로 쓰니 달랐다. 시작은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같은 것들로 몇 페이지를 채우지만 그러고 나면 매끄럽지 않은 이음새들이 보였다. 그 이음새를 들여다보자 내 마음이 손사래 치며 외쳤다. ‘아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 방어기제의 강력한 요구를 나는 호기심, 탐구에 대한 욕망으로 매정하게 제압해 버렸다(나 자신에게 가차 없이 구는 면이 있다). 답을 찾을 때까지 내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잔인할만치 파고들었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것을 (얼추) 이해하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로 끝날 때까지, 나는 계속 글을 썼다.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을 만나다 보면 쿡 찔리는 순간이 있다. 새벽은 그 자극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극이 발생시킨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부어오르고 열감이 느껴지고 스칠 때마다 쓰라린 상처를 외면하면 썩어 문드러진다. 들여다보면 상처는 낫는다. 그리고 더 단단하게 살이 차오른다.

나를 찌르는 사람도 있지만 내 손을 잡는 사람도 있다. 상처 나고 아물고 단단해져서 나는 그들의 손을 더 꽉 잡아줄 수 있다. 그 힘이 나를 새벽에 일어나게 한다.


    3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공동체 사업을 정리했고, 집과 가게를 옮겼다. 지금 집은 외풍이 거의 없고, 아이들은 따뜻한 집에서 내가 깨우기 전까지 잔다. 일찍 일어나기도 하지만 “들어가서 더 자.” 한 마디면 된다. 그만큼 컸다. 새벽 기상은 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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