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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성규 Nov 07. 2018

6. 스마트폰, 널 어떻게 해야 하니?

아이와 함께 걷는 세상. 6

텔레비(텔레비전) 너무 많이 보면 바보 된다.

어린 시절 내가 텔레비전을 조금 많이 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부모님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사실 나는 텔레비전을 그리 많이 본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하나씩 생기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 점차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텔레비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텔레비전을 보면 바보가 된다며 그것을 바보상자라고 하기까지 했을까.

텔레비전에 대한 문제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근거를 들고서 그 심각성을 이야기했다.

집안의 어른(대충 부모님이 되겠다.)이 들고 나는데도 텔레비전에 빠진 아이들이 인사도 제대로 안 한다는 것이며, 텔레비전 때문에 눈이 나빠진다고 시력 감퇴의 주요한 원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즈음에 와서는 그 시대,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주말의 명화라든지 특선 명화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독수리표 마가린'이나 '써니텐'의 광고를 시청하던 때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치 따스하고 정감 있는 모습으로 회상하고 있다.


공포영화를 함께 보면서 누가 가장 무서워 하는지 영화를 보면서 촬영을 동시에 진행했다. 아무도 안 무서워 했다. 이불은 그냥 추워서 덮어쓰고 있을뿐.


만약, 그 시절 텔레비전을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가족이라면 아마도 그런 추억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

게다가, 최근 한 언론 기사에서는 가족과 함께 모여 서로 공유하면서 볼 수 있던 그 시절 텔레비전의 존재가 요즈음 가장 필요한 가족 간의 유대감과 친근감을 더 높여 준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이러한 논리를 그 시대에 설파했다면, 사회적인 여론에 질타를 받거나, 공격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 시대만 하더라도, 미래에 텔레비전보다 더한 스마트 폰이라는 것이 나올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습지만 한 가지 슬픈 기억이 있는데,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는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셨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책을 읽는 것은 좋으나 책에 집중해 다른 것을 신경쓰지 못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책에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밥을 먹으러 오라는 소리도, 누가 나가고 들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나의 태도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버릇없는 아이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뭐, 지금에 와서 책을 읽는다는 것만으로 내가 했던 그런 행동이 정당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시절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에서라도 더 많은 책을 몰래 읽었다. 이불을 덮고 플래시를 켠 채 책을 읽는다던지, 화장실에 앉아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들이 화장실을 못 쓰게 하기도 했었다.

그 덕분에 방대한 양의 책을 읽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나의 시력은 급격히 떨어져 어린 시절부터 안경을 써야 했다.

아버지가 책을 읽는 것을 싫어했던 것 중에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집에 책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나의 위로 세명의 누나가 있고, 나를 포함하면 4명의 아이들이 읽어 대는 책의 수량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거의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했던 우리 집으로서는 매번 이삿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의 존재가 그저 무겁고 귀찮은 짐으로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적 가장 부피가 크고 무거웠던 책은 다른 누구의 책도 아닌 아버지의 의학에 대한 전문 서적들이었다.

어쨌든 이사를 한번 할 때마다 버려지는 책이 부지기수였고, 우리는 어린 마음에도 그 안타까움이 절절했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는지 세명의 누나와 나는 책이라는 것에 집착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25년 가까이 되는 중국 생활중, 1년에 세네 번은 이사를 다니는 와중에도 수 십 박스가 되는 책을 버리지 않고 싸들고 다녔다. 이삿짐센터의 직원들은 책이 든 박스를 옮기며 무슨 벽돌을 넣어 놓았느냐며 항상 핀잔을 주었다.


유학 시절  한동안 머물렀던 옥탑방에 책과 책상이 제일 먼저 자리를 차지하면 소파를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그럼, 도대체 책과, 텔레비전이 스마트 폰과 무슨 관계이길래 이리도 서론이 긴 것일까.

요즈음, 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느 가정에서건 스마트폰을 못쓰게 하려는 부모와 그것을 쓰려는 아이들 간의 전쟁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마치, 그 시절 텔레비전에 미쳐 있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아이들은 스마트 폰에 미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스마트 폰에 중독되는 것은 비단 아이들 뿐만이 아닌데 말이다.

우리 집이라고 별 수 있을까.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중독이 된다는 것은 언제 스마트폰이 주어지느냐의 문제이지 언젠가는 부딛혀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특히,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땅에서 서로에게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휴대전화는 필수였다.

그런데, 연락용으로 구비해준 스마튼폰을 아이들이 연락용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년간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고, 또래 친구들도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우리 아이들 역시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스마트폰에 빠져들게 되고, 스마트폰으로 가족 간의 대화도 단절이 되는 시기가 우리 가정에도 있었다. 작은 아들의 눈은 그렇지 않아도 나쁜데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아내는 스마트폰을 어떻게 좀 해보라고 나에게 끊임없이 요구를 했고, 나 역시 그에 대해 최상의 방법이 무얼까 하고 머리를 싸맨 채 고민에 고민을 했었다.

나는 아이들의 스마트폰을 압수하거나, 사용금지를 시키거나, 일정 시간만 사용하게 하는 그런 방법을 쓰기는 싫었다.

내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랬듯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스마트폰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을 이끌어 갈 것이고, 그것에 대한 경험으로 세상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무작정 스마트폰의 사용을 금지시키거나 그것 때문에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피할 수 없는 문명의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최대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렇게 한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마트폰아! 널 어떻게 해야 하니?"



처음 내가 시도한 방법은 단순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어디서건 3명 이상이 모이면 손에서 스마트 폰을 놓는다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가정의 부모들이 아마 한 번 즈음은 이런 방법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만 지키면 언제 어디서건 얼마나 스마트 폰을 사용하건 막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아이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 가족이 4명이고 집이 거실도 없는 방 두 칸짜리 집이라 어디 밖으로 외출을 가지 않는 이상은 주로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3명 이상은 모여 아이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처음 한동안은 잘 먹혀 들어갔다.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다가도 3명 이상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손을 놓고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잘 알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똑똑해지는지를.

아이들은 점차 3명이 같이 모이게 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스마트 폰을 하는 중에 3명이 모일라 치면 얼른 한 명이 다른 곳으로 가거나, 화장실로 들어가 3명이라는 정원이 차지 않게 했다. 3명만 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이건 마치 법의 망을 교묘히 피해 불법을 저질러도 법적 근거가 없어 처벌을 못하는 경우와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들과 한 번 약속한 것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약속을 어기고 번복하기 시작하면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른이라는 이름과 부모라는 자격을 이용하여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교육적 철학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안 하는 것이고, 내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그 허점을 찾은 후에, 나는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어떤 조건을 걸고 무엇을 못하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틀려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조차도 그런 류의 제안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니 말이다.

아이들은 내가 제시한 방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열심히 피해 다녔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나는 확실한 방법이 떠오르기 전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 방법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를 읽던 중 익숙한 글귀를 보게 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평소 같으면 뭐 그런 말이구나 하고 넘어갔겠지만, 그때만큼은 피할 수 없는 이 스마트 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말이었다.


스마트 폰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건 단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목수가 가구를 만들 때 필요한 망치나, 톱과 같은 도구인 것이었다. 단지, 그 하나의 도구가 한 가지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도구라는 것이었다.

지금껏 나는 스마트 폰이 아이들에게 주는 단점만을 가지고 아이들과 스마트 폰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마트 폰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자 모호한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몇 가지 사실들이 확연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그것을 정리했고, 크게 두 가지로 생각이 모아졌다.

첫 번째는 아이들이 아직 스마트 폰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똑똑한 스마트 폰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 둘을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하고 고민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우리 집은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던 회사에서 만든 스마트 폰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이미 출시된 지 몇 년은 지나 최신 기종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름대로 스마트하게 굴러가는 제품이었다.

한 번은 스티브 잡스의 회사 홈페이지에서 제품의 홍보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한 아이가 자기의 스마트 폰으로 찍은 영상을 바로 편집해서 가족들에게 보여 주는 영상이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회사 생활을 하며 홍보용 영상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던 나는 아이들에게 스마트 폰으로 영상을 만드는 것을 몇 가지 보여 주고는 각자 한편씩 짧은 영상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학교도 가지 않고 할 일이 없이 집에서 뒹굴고 있던 아이들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영상 편집에 필요한 클립(영상 조각)을 만들기 위해 상하이에서 이쁘다고 소문난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영상 클립을 만들기 위해 길을 나서는 두 아들

우리가 살고 있던 집 근처도 상하이에서 알아주는 명소(?)인지라 우선 거기서 몇 장면을 찍고 신천지라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전에 아이들은 콘티를 먼저 만들어야 된다며 카페에 앉아 주제를 고르고 배경음악을 선정하는 열의도 보였다.


카페에서 제법 심각한 분위기로 영상물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 의논하는 벼리와 누리

밤이 늦도록 추위에 떨며 필요한 영상을 다 찍고 난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찍어온 클립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모두의 손에는 스마트 폰이 쥐어져 있었지만, 스마트 폰에 맹목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스마트 폰을 똑똑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작은 아들 누리가 가진 스마트 폰은 초창기에 나온 워낙 구형이라 영상을 편집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누리는 큰 아들 벼리의 영상물에 등장하는 주연 배우로 활약하기로 했다.

나는 스마트 폰에 깔려 있는 앱의 사용법을 알려주기 위해 우선 함께 찍은 클립으로 앱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영상물을 만들어 보여 주었다.


스마트 폰에 깔려 있는 앱으로 뚝딱 만들어 본 영상물

몇 번의 조작으로 근사하지는 않더라도 금방 하나의 영상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아이들은 흥미를 느꼈는지 며칠을 두고 동영상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큰 아들 벼리는 배경음악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뒤 벼리는 자신이 만들려는 영상의 인트로 부분을 먼저 메시지로 보내왔다. 

너무 짧지만 그런대로 분위기가 가득하게 들어가 있고, 본 편이 궁금해지는 인트로 영상이었다.


감칠맛 나게 했던 벼리의 인트로 영상 작품


영상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 뒤, 아이들의 스마트 폰 사용이 줄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전히 스마트 폰에 집중을 하고, 손가락에 몸살이 날 정도로 집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영상을 만들기 위해 야외로 나가고, 콘티를 짜기 위해 의논을 하는 가운데 스마트 폰이 단지 게임을 하거나 SNS를 하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조금의 주의만 기울여도 많은 것을 해 내는 도구로 인식을 바꿔가고 있었다.


물론 이런 한 가지의 일로 스마트 폰 중독을 이겨 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것저것 도구로 사용될 방법을 연구해 보았다. 

여전히 스마트 폰에 빠져 그 좋아하던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에게(사실 한국 책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은 이유도 있다.) 전자책 앱을 소개해 주어 스마트 폰으로 책을 보게 했다.

물론, 그 때문에 눈은 계속 나빠지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아이들이 커서 사회에서 활동할 즈음이면, 의학이 아주 아주 발달해서, 스마트 폰으로 나빠진 눈을 쉽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피할 수 없는 문명의 도구를 피하지 말고 즐기면 된다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간단한 생각이었지만 한 번 즈음은 아이들에게 그것을 못하게만 할게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쓰게 할 방법을 찾아보게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 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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