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걷는 세상 5
에이, 그것도 몰라? 그 정도의 내용은 정상적인 '초중고등학교'를 나왔으면 다 아는 상식인데.
누구나 한번 즈음은 이런 말을 들어 보았거나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주 보편적인 말들이 내 두 아들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정상적인 초중고등학교의 과정을 우리 아이들은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들, 즉 국가의 교육과정을 착실하게 배운 사람들은 그 시대에 공통적으로 함께 거쳐오는 공감대라는 것이 있고, 국가에서 정한 교육과정에 속해있는 보편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는 중학교 음악시간에 다 배운 것 아니야?", "가치관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다 배운 내용이지."라는 것들이다. 사실 이런 것을 학교에서 배운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런 지식을 배울 기회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홈 스쿨링을 하거나, 조기유학을 하게 되면 이러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지식,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며 가지게 되는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힘든, 별거는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어떤 특정 상황에서는 별거가 되어 버리는 아주 큰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건 그걸 배워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괜찮아.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그것을 기억하거나 망각할 그 기회조차 없었다는 '기회의 자격 박탈'이라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 공백을 메워야만 하는지, 만일 메운다면 어떤 방법으로 메워 넣어야 하는지가 심각하게 다가온 일이 있었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상하이로 온 뒤, 1년은 학교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홈 스쿨링 비슷한 것을 하기는 해야 했다. 아무런 할 것이 없었던 터라 뭐라도 해야 했는데, 큰 아들은 고졸 검정고시를 위해 한국에서 사 온 책 한 권으로 공부를 했고, 작은 아들 누리는 초등학생용 수학 학습지 몇 권을 틈틈이 풀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만 하더라도 정말 좋은 교육이라 생각하던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 보편적인 지식의 습득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코딩 교육이 유행을 일으키며 코딩에 대한 조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한국 사회를 떠들석 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코딩 교육을 뒤로 하고라도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 5학년의 음악 시간에는 뭘 배울까? 도덕과 체육시간에는 뭘 하지? 나중에 누리가 한국에 잠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났을 때 친구들은 다 아는 그런 보편적인 상식과 지식을 하나도 모르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과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았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음악, 체육, 역사, 윤리 등이 차례로 떠올랐다.
영어와 수학, 그리고 과학분야는 여기 학교를 다니게 되면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머지 국어와 사회, 음악, 역사, 윤리 등이 문제였다.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았지만 한국에서 배우는 내용을 모두 똑같이 배울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의 목적을 파악하고 그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그 공감대와 지식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내 나름의 방식을 사용해 음악과 미술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음악과 미술에 대해 자세하지는 않더라도 대강의 보편적인 지식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부모나 다른 어른이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고민을 하던 중 일 때문에 한국을 한 달 정도 다녀올 일이 있었다. 나는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그냥 아이들 스스로에게 그 방법을 찾아보게 숙제로 내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교육자도 아닌 내가 무슨 특정 결과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고 내가 찾아내어야 할 해결책을 그냥 급한 마음에 아이들에게 떠 넘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아들 벼리에게는 "음악의 역사"라는 주제를 주어 자유롭게 조사하게 했다. 작은 아들 누리는 "미술의 역사"라는 주제로 조사를 하라고 했다. 두 아들은 범위가 너무 넓고 방대하다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모호하고 방대한 내용이기는 했었다.
음악의 종류가 한두 가지도 아니고, 시대별 나라별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너무 많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힘든지 불평하는 큰 아들 벼리와는 달리 작은 아들은 자신이 해야 할 주제가 얼마나 크고 복잡한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는지 그냥 눈만 멀뚱 거리고 있었다.
"모호한 업무 지시를 구체화하고 시행할 수 있는 업무 능력."
10여 년 전 미국 회사에서 관리자의 자격으로 직원을 뽑을 때 주어진 면접 평가 기준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나는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아이들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빠가 내주는 숙제에 대한 정답은 없어.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거든. 우선 그 주제에 따라 뭘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생각해보면 될 거야. 너희들이 무슨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점수를 내는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니니까 인터넷에서 전부 베껴도 되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상관없어. 하지만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무얼 찾고 있는지만 알고 있으면 충분해."
정답은 없으니 그냥 어떤 방식으로든지 시작을 해보라는 말을 던져 주고는 한 달을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다.
한 달이 지난 후, 내가 상하이로 다시 돌아왔을 때, 두 아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각자의 숙제를 내 앞에 내어 놓았다.
큰 아들은 10년은 더 지난 구닥다리 노트북에 있는 키노트를 이용해 PT를 만들어 가족 앞에서 시연을 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내용이었고, 짜임새도 있었다. 무엇보다 음악의 역사에 대해 나름의 주관을 곁들인 큰 아들 벼리의 PPT시연으로 나와 가족들이 함께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 놀라웠다.
자기의 컴퓨터가 없었던 누리는 초등학생답게 노트 위에 연필로 빼곡하게 미술의 역사를 적어 놓았다.
고대와 원시 시대의 미술 양식인 에게 미술, 그리스 미술, 로마 미술을 시작으로 중세의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 바로크와 로코코 미술을 거쳐 근대의 인상, 낭만, 자유, 사실, 신인상주의까지. 마지막으로 현대의 입체파와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 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팦 아트와 비디오 아트에 이르기까지 10장이 넘는 내용을 어딘지 모르지만 착실하게도 베껴서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집에 걸려 있는 싸구려 그림을 가리켜 어느 시대 어떤 화풍의 그림이라고 이야기하며 숙제의 발표를 마쳤다.
아이들이 마친 숙제를 다 함께 감상한 후에, 나와 내 아내는 감동을 했고, 두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도 대견한 듯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큰 아들 벼리에게 소감을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도대체 뭘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냥 아무렇게나 시작을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어차피 이걸로 무슨 대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점차 모양을 갖추어가게 되고, 무얼 수정하고, 무얼 보완해야 하는지 눈에 보이더라고요. 앞으로 어떤 모호하고 방대한 내용의 주제를 줘도 문제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처음 한 페이지를 시작하는 게 힘들었죠. 그런데, 그 처음 한 페이지도 사실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첫 페이지는 계속 바뀔 수 있고, 그걸 바꾸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음악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을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지만, 큰 아들 벼리는 모호한 일을 구체화시켜 일을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첫 발을 내딛는 방법'까지 깨닫게 된 것이었다.
작은 아들 누리의 소감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연필로 글을 쓰느라 팔이 아팠다는 것이다. 자기도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요구사항을 더해서 말이다.
나름 성공한 숙제인 것 같았다.
나는 며칠 후 아이들을 데리고 한동안 친하게 지냈던 영국 친구의 화랑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영국의 유명 사진작가들이 찍은 사진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온 큐레이터와 사람들이 모여 음료를 마시며 전시장을 한가롭게 거닐거나 작품 앞에 서서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었다. 친구는 사람들이 감상을 하는 동안 한 껏 마신 맥주에 취해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동안 미술관이라 하면 왠지 근접하기 힘든 곳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은 어설픈 영어를 구사해가며 자기보다 수 십 살은 더 많은 영국 사람들과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그런 그림을 연상하지는 말자. 그냥 단어 한 두 가지로 열 마디의 말을 생략해 버리는, 손과 표정이 말보다 우선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못 알아들으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 뒤에는 언제나 호탕한 웃음이 뒤 따랐다.
화랑에서 나온 후 우리는 젊은 예술가들의 그라피티가 있는 장소를 걸으며 산책을 했다. 작품을 보며 감상을 한다기보다는 그 작품들이 있는 곳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간간히 조각 공원이나 미술관 같은 곳을 방문하여 그곳의 분위기를 느끼며 놀다가 들어오곤 했었다. 큰 아들 벼리는 음악 축제나 재즈 패스티발 같은 곳은 빼먹지 않고 찾아다녔고, 학교를 들어간 후에는 대학 밴드부를 결성해서 공연도 한 차례 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간혹 벼리와는 음악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서로 싸우기도 한다. 싸우는 경우는 보통 어떤 록 가수의 기타 연주 중에서 어떤 부분이 몇 번 반복이 되는지를 두고 다투다가 직접 음악을 찾아 듣고 확인을 하고서야 멈추게 된다. 대부분 큰 아들 벼리의 주장이 다 맞는 이야기였다.
나는 보편적인 지식을 알게 해주는 방법으로 방대하고 폭넓은 주제를 던져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방대한 지식을 조사한 후에, 자신의 삶 속에 하나씩 녹여 넣기 시작했다. 한번 하면 그치는 숙제가 아니라 그 방대한 내용의 주제를 삶을 살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한차례 더 숙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내 준 숙제였다.
큰 아들 벼리에게는 '과학의 역사'라는 주제였고, 작은 아들 누리에게는 '철학의 역사'라는 주제였다.
아이들이 하기에는 간단한 내용의 주제는 아니었다.
- 6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