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밤의 산책
호주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벼리에게,
어제는 네 동생 누리랑 저녁 산책을 나갔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 누리는 개학을 앞두고 밀린 숙제를 앞에 두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저녁 산책은 빼놓을 수 없었는지 막 그친 비가 남긴 쌀쌀한 날씨에도 함께 밤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동네 스타벅스를 지날 무렵 그쳤다고 생각했던 비가 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타벅스의 나무 문을 열고 대충 음료를 주문했다.
그렇게 아메리카노 한잔과 바닐라 라테를 시켜 놓고 벼리에게 보내는 누리와 나의 이야기는 비가 그칠 때까지 끝이 나지 않았단다.
"벼리가 아빠랑 조금만 더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왜요? 2년 넘게 같이 있었잖아요."
"음, 2년은 너무 짧았어."
그랬다. 큰 아들인 네가 나와 함께 제대로 함께 지낸 것은 겨우 2년 남짓.
네 동생 누리는 지금 마치 네가 그랬던 것처럼 너와 비슷한 모습의 중학교 1학년을 보내고 있단다.
다른 것이 있다면, 너의 중학교 생활은 내가 함께 하지 못했지만, 누리는 나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
"중2가 되니까 이제 슬슬 사춘기가 오는가 봐요. 짜증도 나고, 몸도 더 피곤해지는 것 같고요."
입술 가득 라테의 거품을 머금은 누리가 지금 사춘기라며 사밍아웃을 선언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람들이 그러던데요. 제가 지금 사춘기라고."
사실 아빠는 부모의 말에 고분고분하던 아이들이 중2가 되어 달라지면 사춘기, 반항기 또는 중2병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여간 불편하지가 않단다. 아니 어찌 보면 그런 시기를 마치 부정적으로 특정 지어 버리는 일부 사람들의 그런 의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빠는 이 시기를 사춘기나 중2병, 또는 반항기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또 그렇게 부르기도 싫은데."
"그럼요?"
"이 시기는 너희들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해.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가치관의 형성기라고 할까."
"......."
"가치관이 형성되다 보니, 자기 생각과 주장이 생기는 것이지 그게 꼭 부모의 말에 반항한다는 것은 아니거든. 세상의 관념과, 부모의 생각에 의심을 품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혁명가나 과학자의 마음가짐이지 반항이라고 할 수는 없거든.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이 발전하게 한 것은 반항아들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요즘 네 동생 누리는 책을 보이는 대로 읽는단다. 그 모습은 마치 너의 중학교 때와 비슷하지. 서면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서 서점에 앉아 책을 읽는 네 모습 그대로 누리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오래된 책을 뒤지며 즐거워하고 있지.
아마도 이때였지 않을까. 벼리 네가 서서히 너의 가치관을 형성할 때가.
내가 권해주는 책이 아닌, 네 스스로의 관심사에 따라 책을 읽었고, 내가 권해주는 음악이 아닌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들었지.
물론, 내가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일본 문학과 일본 음악에 빠진 너를 내가 어찌할 수는 없었단다.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대부분의 모든 문화와 국가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대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나름의 선입관이 존재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국뽕'에 가까운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호주에 있는 벼리 형은 정말 UN 같은 데서 일하면 딱 일 것 같아요."
누리가 뜬금없이 너와 UN을 들먹인다.
"왜?"
"벼리 형은 중국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일본어까지 잘하니까 UN에서는 그런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요?"
"글쎄......, 무엇보다 그런 일을 네 형이 좋아하느냐가 중요하지."
"벼리 형은 노는 거 좋아하잖아요. 많이 다니고,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하고. 전세게를 다니면서 사람들 도와주고 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제가 볼 때는 벼리 형이랑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벼리 형은 정말 대단해요. 가만히 보면 공부는 하나도 안 하는데 성적은 엄청 좋단 말이에요. 게다가 성적만 좋은 게 아니라 실력도 장난 아니거든요. 중국어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그런데 일본어는 진짜 대단해요.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어 배워서 여자 친구까지 일본 여자라니."
"언어는 너도 잘하잖아. 너도 한국어, 중국어를 할 줄 알고,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하니까.. 3개 국어는 하네."
"나는 벼리 형한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중국어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많이 어설프다고 해야 하나. 영어는 말할 것도 없죠."
"누리야. 넌 이제 중학생이야. 아직 배울 시간은 많아."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면 네가 일본 소설을 읽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배운 일본어가 아빠의 틀을 깨기 시작한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너는 그렇게 너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네가 만들어가는 그 세상에 조금 더 나의 생각과 고민이 들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사실이란다.
지금 네가 만들고 있는 너의 세계에 내가 못 마땅하다는 말은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단지, 내가 읽었던 책들, 내가 너의 나이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들에 대해 조금만 더 너와 같은 시간을 가졌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요즈음 네 동생 누리를 보면서 많이 든단다.
"아빠의 책들은 왜 이렇게 어려워요?"
"그건 지금 네가 뽑아들고 읽는 책이 어려운 책이니까. 비트겐슈타인을 중학교 1학년이 읽기에 쉬운 것은 아니란다."
너도 그렇고, 누리도 그렇고, 아빠의 책들을 본 사람들은 꼭 한 번씩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꺼야.
그런데, 요즘 들어 누리가 그런 책들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으니 희한한 일이지.
사실 아빠의 책들이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이 되고, 간혹 깨알 같은 책벌레들이 글을 읽는 사이를 헤집고 다녀서 그렇지 나름 재미는 있단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이런 오래된 책들과 그 속에 있는 나의 이야기를 너와 함께 나눌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상하이에서 함께 지낼 때면 매주 햄버거와 맥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함께 보내었는데. 물론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너와 나의 설전이 있었지만, 그런 시간이 나와 너에게 중요했던 것은, 나는 네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너의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너에게 조금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단다.
너와 내가 보낸 시간은 정말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너의 가치관은 네가 움직이고 있는 세상에서, 네가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더 이상 아빠가 끼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이 든단다.
하지만, 아빠는 네 동생 누리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또는 작은 방 책상 위의 개인 다기에 넣어진 야생 1호 홍차를 마시면서 너의 이야기를 하며 너와 못 다했던 시간들을 메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