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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성규 Aug 29. 2019

누리에게 쓰는 편지.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일자리를 알아보며 이력서를 쓰는 동안 중국에서 지낸 생활을 계산해 보니 정확하게 25년 하고도 1개월이 더 지났더라.

우스개 소리로 항상 하듯 정신 차리지 못하던 네 어린 상하이 시절을 뺀다면, 너는 거의 정확히 5년을 상하이에서 보냈더구나.

너에게는 5년의 흔적이었지만, 아빠인 나에게는 25년의 흔적을 정리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었지.


한국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 저녁. 너와 나는 그동안 우리와 함께 해 왔던 글라스 보드 앞에서 너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

한국으로 돌아가 어떤 삶을 다시 시작할 것인지,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이리저리 글라스 보드 위를 지나가는 검은색 마커가 불확실한 미래에 하나씩 선을 긋던 시간이었다.


100점 만점에서 4.5점을 받았던 너의 그 첫 중국어 시험은 5년이 지나며 정확하게 70점으로 합격점을 받아 내었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쏟아 내는 중국어 앞에서 그저 어설픈 미소만 지어내고 있던 너의 오른손에는 나도 읽기 힘들어하던 김용 작가의 천룡팔부라는 소설이 중국 원어로 쥐어져 있구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그 나라가 간직한 역사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하던 너의 모습이 새삼 떠 오른다.


너는 너의 형 벼리와는 또 다른 성향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

너무나도 다른 너희 둘의 성격에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새로운 환경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라고나 할까. 물론 너는 너의 형인 벼리가 앞 뒤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스타일이라면 넌 더욱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


한국 사람이 한국에 돌아와 공부를 한다는 것이 왜 새로운 환경이 되어야 하겠냐만은. 그동안 너는 그 길지 않은 5년의 시간 동안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환경, 교실에서 홀로 이방인이 되어야 했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는 끊임없는 관찰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시간이었지.

돌아보면, 네 어린 그 머리로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 내었나 하는 대견함이 문득 느껴진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학교 생활, 2월 학기와 9월 학기가 서로 반복되며 꼬여버린 너의 학년. 한국으로 돌아와 일반 중학교에 보낼 것인지, 너의 형처럼 그냥 검정고시로 학력을 인정받아야 할 것인지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단다.


급할 땐 무기로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두꺼운 모비딕이라는 책을 읽는 너의 사진을 본 네 또래의 여자 아이가 질색을 했다는 이야기에 아빠는 너의 그 모비딕이라는 책의 두께를 슬쩍 손으로 가늠해 보기도 했다는 걸 아는지.

비트겐슈타인이 쓴 확실성에 관하여를 읽는 너를 두고 엄마는 아빠에게 걱정 어린 질타를 하기도 했었단다. 하지만 아빠는 사실 네가 그런 책을 읽고 있다는 것에 신이 났던 것은 확실했다.

지나간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누렇게 변해버린 책의 종이 색깔만 봐도 분명했고, 간혹 책 위를 스멀거리며 기어가는 책벌레들은 그 시절 아빠가 그 책을 읽고 난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 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야 아빠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단다. 너를 보면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이 아빠에게 큰 걱정거리로 다가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단다.


부모가 자식이 그런 책을 읽고, 어른스럽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은 모두 똑같겠지만, 사실 그건 15살의 자녀를 위한다기보다는 부모의 자기만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는 것이었단다.


이제는 너를 또래의 아이들과 또래들이 하는 생각을 하며 보내게 해야 하는가 고민을 해 보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하려는 아빠의 행동 역시 너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단다.


사실 아빠가 사는 오늘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루이고, 아빠가 맞이해야 할 내일은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란다.

그건, 네가 살고 있는 하루하루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지. 우스갯소리로, 48살이 된 아빠는 한 번도 49살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49살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단다. 그저, 매일매일을 도전하듯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 직시할 뿐이지.


9월이 시작되면, 너는 5년 전 상하이에서 하루를 시작했듯, 또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거야.

5년을 새롭고, 신나고, 힘겹게 잘 보내왔듯이, 앞으로의 5년 또한 너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즐거움이 있을 거라 믿고 있다.


그동안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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