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만을 위한 '원더우먼'이 되는 것이 여자의 삶인 줄 알았다.
여자의 삶은 그냥,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다.
엄마의 삶은 이런 것이구나.
내가 본 우리 엄마는 '원더우먼' 그 자체였다.
항상, 제일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깨우고, 아침밥상을 차리고, 아빠 옷을 챙겨드리고, 우리 준비물을 챙겨주고, 모두를 보낸다. 그다음, 아침 빨래를 위해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가게로 나가신다. 가게에서도 여러 손님을 대하며 귀를 열고, 손님 성향에 맞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신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말하기 싫어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온몸은 각자의 역할을 하느라 분주하다. 재료 가지러 이리저리 다리는 바삐 움직이다가 불판 앞에서 멈추신다. 어깨와 손목, 손가락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손님들이 주문한 메뉴를 만드신다. 주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리와 발은 한 자세로 고정되어있고, 어깨-손은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신다. 다 만들고 난 후, 또 손님에게 서빙하러 또, 동분서주 움직이신다.
가게를 마치고 나서도, 가족들을 위한 식사 메뉴를 고민해야 하고, 재료도 사야 하고, 그 재료를 다듬어 요리를 하신다. 명절, 제사 일정도 꼬박꼬박 챙겨서 차례상,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을 그 날 만큼은 하루 종일 하신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예전에 편찮으셨던 친할머니도 정성껏 보살펴주셨었다.
그렇게... 엄마로서의 역할과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잘 해내셨던 엄마였다.
오로지 가족만을 위한 '원더우먼'이 되어야 했던 엄마.
나는 엄마와 같은 '엄마'는 못 될 것 같다.
저렇게 모든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엄마’의 삶이 결코 불행한 삶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그와 같은 일을 해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자신이 없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능력 없는 '아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능력 없는 '엄마'가 되겠구나 싶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으로 인해, 나 자신을 능력 없는 존재라 생각하며 내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기가 겁이 났다. (아니, 싫었다.)
엄마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아니, 그렇게 살기 싫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에 충족될 자신이 없던 나는, 운 좋게 배려심 깊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적어도, 집안일을 여자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생각이 깊은, 섬세한 성향의 사람이었다.
약 1년 넘게 이어져온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은 나름 행복하다. 아주 유순한 생활이다. 다만, 결혼 초창기에 신랑의 거주지(신혼집이 있는 곳)로 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직을 해야 했다. 이직 생각에 나름 걱정이 많았다. 이직할 회사에서 내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분명 '출산 문제'로 채용을 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최대한 오래 일할 사람을 뽑으려고 하니까.
역시나, 면접 볼 때 '아이 계획은 아직 없냐'는 질문이 나왔었다. 나는 당당하게 '없다. 나는 계속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당장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 남편이랑도 얘기를 한 부분이다.'라고 답변을 했다. 다행히, 일초의 망설임 없이 이야기 한 덕택인지는 몰라도 신혼집과 그나마 가까운 적당한 곳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기혼 여성의 일'은 나의 가장 큰 최대 관심사였다. 결혼 후에 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으로 인해 아주 큰 고민으로 다가왔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자연스레 여성의 일 뿐만이 아닌, 여성을 중심으로 둘러싼 족쇄와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 관습까지 관심의 영역이 넓어졌다.
결혼하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결혼을 한 후, 기혼 여성의 커리어 유지에 대한 장벽을 한 번 겪고 나니
'여성의 삶'을 둘러싼 일련의 모든 것들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냥 어쩔 수 없는 거라 치부했던 것들이 나에게 불편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해야 함을 느낀 것이다.
페미니즘에 입문하면서 점점 나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나를 옥죄는 것들이 뭐가 있었는지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먼저, ‘결혼’ 후의 내 일상을 되짚어봤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감정이 항상 기쁨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생활하면서 느낀 건, 남편이 나를 서운하게 해서 생기는 감정노동보다 결혼제도가 낳은 관습에 의한 감정노동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시어머님, 남편 개개인의 인격체로서는 나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제일 대표적인 게,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집안의 행사를 치러야 할 때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며느리의 역할은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로 인해 형성된 거라는 걸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무튼, 이런 사실들을 알아가며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할수록, 나의 인지부조화 현상은 생각보다 심해졌다.
페미니즘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여성을 인형으로 만드는 패션-미용 산업과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아직도 견고하게 자리 잡혀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은 알게 모르게 사회가 주입시켜온 ‘남성우월주의적 관점’에 물들여져 있다. 이런 것들을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느끼며 몸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계속된 인지부조화 현상 때문인지) 나에게 약간의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남들의 언행에 예민한 촉을 세우고, 나도 모르게 내뱉는 남녀차별적 언어를 인식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일명, 나는 '프로 불편러'가 돼가고 있는 듯했다.
옛날엔, 걸핏하면 불쾌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냥, 좋게 좋게 살면 되지 왜 저럴까.
그땐 알지 못했다.
불쾌감을 표현해야 할 일에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나 또한 여태껏,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 동조하거나 '남성우월주의 체제'를 더 견고하게 만들었을 언행을 해왔을 수도 있다. (물론, 내가 내뱉은 말과 행동이 차별적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 전에는, 그게 당연한 거고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여성임에도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얼마나 이 사회가 오래전부터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을 구분 지어 주입시켜온 건지 보여주는 사례다.
결혼 후에 일이 끊길 뻔한 경험을 직접 겪은 후에야, 페미니즘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 나 또한, 페미니즘을 알기 전까진 무의식적으로 ‘실수(차별적 언행)’를 해왔던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모순적인 행동을 한다. 그래도 이왕이면, 앞으로 덜 실수하고 덜 모순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더 공부하려고 한다.
<결혼 후에 하게 된 페미니즘 공부>에 연재할 글들은 내가 직접 겪은 일상 또는 소비한 콘텐츠를 대상으로 ‘성평등적 관점(페미니즘적 시각)’을 통해 깨달은 점, 느낀 점들을 위주로 쓰려고 한다. 나 또한 계속 알아가고 깨우치기 위해서.
'평등'이라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평등’을 향해야 함이 분명하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와 상상력이라면,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