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첫아이때부터 아들보다는 딸을 원했고 4살 큰 딸아이에 이어 둘째도 딸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성별을 알기 전부터 ‘딸이 아니면 어떡하지?‘ 라며 어찌나 불안해하던지, 처음엔 그 모습이 농담 섞인 행동인 줄 알았는데 남편이 지은 태명을 보고는 ’아~ 이 사람 진심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무딸”
없을 무의 무(無)가 아닌 순수하게 ‘무조건 딸!’ 이어야 한다는 남편의 소망을 가득 담은 순우리말(?) 태명이다. 난 사랑스러운 이름도 많은데 태명이 ‘무딸‘이 뭐냐며 투덜댔지만 임신기간 내내 큰 아이는 ’ 무딸‘이로 불렸고 조리원에서 ‘무딸이어머니~ 근데 무딸이 뜻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야 하는 난감함은 나의 몫이었다.딸이라 육아하기 쉬울 거라는 남편의 예상과는 달리 첫째는 아들 몫까지 담당한 천방지축이었고 우리 부부는 둘째 딸은 더도 덜도 말고 조금 얌전한 아이였으면 좋겠네~ 하는 소박한 기대가 기다림의 전부였다. 당연히 건강할 거라는 생각과 함께.
남편은 이런 모습을 상상했을 지도 모르겠다.
2015년 3월, 안정된 주수로 잘 크고 있는 둘째를 유도분만해서 출산하기로 했다.분만일 당일, 통증에 힘들어하는 내 옆에서 남편은 두 딸의 아빠가 될 생각에 마냥 들떠 있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분명 아이 한 번 안 낳아본 남자들의 너스레 떠는소리였을 거다.) ‘둘째는 금방 낳는다던데~’ 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무통주사를 맞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나에게 컬투쇼 웃긴 사연 모음 영상을 틀어줬다.웃기면 덜 아플 거라는 정말 남편스러운 배려(?)넘치는 행동이었다. 눈을 흘기며 남편을 쳐다봤지만 웃기니까 아픔이 덜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벌어질 불안의 기운은 감지하지 못한 채, 남편은 지인들에게 연락할 준비를, 난 궁금한 둘째 얼굴을 마주할 생각에 설레어하고 있었다.
진통 간격이 짧아지며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렸고 난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마지막 힘을 줬다.드디어 아이가 나왔고 해냈다는 기쁨으로 기진맥진 누워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기다렸다.
‘찰싹, 찰싹’
아이 엉덩이 때리는 소리가 크게 났는데 이상하게 공허한 적막만 흐를 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만실 내에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간호사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나에게 잠깐 보여주고, 바로 신생아실로 데리고 갔다.
내 눈앞에 잠깐 보였다 사라진 아이는 마치 드라마 분만실 장면에서 실제 아이를 대신해 보여주는 인형같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간호사는 일시적인 ‘신생아 빈호흡일 수 있다. 아침 9시 소아과 선생님 출근하시면 아이 봐주실 거다’ 라며 밤사이 인큐베이터에서 잘 지켜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병실로 올라왔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9시가 되자마자 남편은 신생아실에 아이 상태를 문의했고 소아과 선생님이 아이를 살펴본다고 해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병실 전화로 10시쯤 아이 괜찮으니 수유실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별 거 아니었나 봐. 얼른 가보자.”
남편은 수유실 앞까지 데려다줬고 혼자 들어간 수유실에서 만난 둘째는 걱정했던 거에 비해 숨도 잘 쉬고 눈도 잘 뜨고 심지어 너무 예쁘기까지 했다. 모든 상황이 다 정상으로 돌아온 거 같아 안심이 되었다. 밖에서 긴장했던 신랑도 그제야 지인들에게 둘째 탄생 소식을 알리고 회사로 바로 출근하며 지인들에게 출산하며 생긴 작은 에피소드 썰을 풀 생각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내선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 벨소리가 그렇게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신생아실인데요. 아이가 경련을 해서 구급차 불러 대학병원으로 가야 할 거 같아요.
저희가 일단 구급차는 불렀고요. 남편 분은 같이 계시나요?”
내가 아이를 보고 온 지 불과 20분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놀라서 남편에게 바로 전화를 했고 남편은 회사로 향하던 차를 병원으로 급하게 돌렸다.산부인과에서 부른 구급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해 각종 검사를 하고 몇 시간 뒤 의사가 남편을 불러 ‘검사결과 중 뇌파검사가 안 좋다. 우리 병원에는 소아신경과가 없으니 서울의 큰 병원으로 당장 전원 시켜야 한다 ‘ 라며 직접 친절하게도 서울 신생아실에 받아줄 병원이 있는지 알아봐 줬다. 의사의 이런 친절함이 아이 상태의 심각성을 더 와닿게 했다. 남편은 다시 아이와 함께 연락이 닿은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구급차를 타고 출발했다. 남편 말로는 아이는 가능 동안에도 여러 번 경련을 했다고 했다.
전화로만 상황을 전달받았던 난 그때까지도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 같다. 단지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아이가 흔들리는 구급차를 타고 여기저기 이동해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 속상했을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병원에서 검사결과를 듣고 돌아온 신랑의 표정은 너무 어두웠다. 내 앞에서 입을 잘 떼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뇌파결과가 많이 안 좋대. 의사가 그러는데 얼마 못 살거래. 나도 찾아봤는데 생전처음 들어보는 병명이라 검색도 잘 안되고 예후도 안 좋은 거 같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연기하듯 어색하게 얘기하는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그래도 뭔가 희망적인 얘기가 나오길 기다렸던 거 같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평소 남편은 ’ 남편=유머’ 일 정도로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눈물을 보이다니.
그 모습에 이 거짓말 같던 상황이 조금씩 사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난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인데.. 왜??’
드라마 같은 현실에 자꾸 도돌이표 같은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남편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병원의 진단이 오진이었다고 해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