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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Oct 17. 2023

스물아홉번째 길. 내용들의 짝짓기

기쁨은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슬픔은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일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일은 세계의 배경으로 깔려 있다.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내용'의 일이 일어나는가의 문제이다.

일의 내용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나고 헤어진다면 적어도 크게 문제되는 일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기본 조각들 같은 것이 아니다. 내용들은 서로에게 파고들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는 침입자가 될 수 있다.


물질들이 만나서 상호작용하고 변화하는 일들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에는 내용들이 만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은 일어날 뿐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일의 내용이다.

어떤 일에 이어지는 다음 일은 변화한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이다. 일의 내용은 이어지는 다른 일에서 같은 내용으로 반복될 수도 있고, 다른 내용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일이나 이야기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의 일과 이야기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일은 다른 일들과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자리로 구별된다. 그래서 모든 일은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많은 일들의 고유한 자리와 관계들이 거시적 시공간 만든다.

내용은 고유한 특징을 차지하지만 특정한 자리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러 일에서 반복해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나타나고 변화하고 반복되는 것은 일 안에 포함되어서 현실적인 힘을 갖기 때문이다. 

추상적으로는 무한히 다양한 내용들이 한꺼번에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정한 자리에 다양한 내용들 중에서 바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작동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각각의 특징을 갖는 일의 내용들은 마주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빛과 공기처럼 서로 상관없이 지나칠 수도 있고, 자외선과 피부처럼 서로 파고들어 변화하거나 파괴할 수도 있고, 적혈구와 결합한 산소처럼 서로 공존하면서 또다른 효과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각각의 내용들이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내용들의 만남과 변화에도 고유한 진행 특징이 있게 된다. 그래서 내용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일과 이야기의 진행을 만들게 된다.

내용상의 특징 때문에 서로 다른 일들이 만나서 새로운 일을 진행할 수 있고, 내용상의 공통점 때문에 일과 이야기가 만나서 같이 일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봤을 때 일은 내용들의 짝짓기라고 할 수 있다. 짝이 될 수 없는 사이가 있고, 서로 부딪히고 방해하는 짝이 있고, 결합되어 새로운 내용을 낳는 짝이 있다.

일의 내용과 이야기의 내용도 분리되고 결합하는 중요한 짝을 이룬다. 이들의 짝은 경험과 역사의 이야기를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원초적인 메타인지 효과를 낳다.

그리고 두 내용들 사이의 관계는 고유하고 일정하다고 해도 언제든지 다른 내용이 추가로 짝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내용들의 짝짓기는 한없이 다채로워질 수 있다.


내용들이 일을 통해 만나고 변화하고 새로운 내용을 끌어들여 왔다는 것을 우주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헛수고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지난 일들이 만든 확고하면서 다양한 내용들이 결과 남겨지기 때문이다.

생존이라는 베이스캠프를 확고하게 다지면서 새롭고 이로운 내용을 발생시키는 행복을 향한 우리 의지와 정서는 일에서 생기는 내용들의 짝짓기에 그 씨앗이 내재해 있다.




우리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거나 또는 촉진시커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의 관념은 우리의 사유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거나 또는 촉진시키거나 방해한다...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수동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슬픔의 정서를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나는 아래에서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서 나는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 또는 유쾌함이라고 하지만, 슬픔의 정서는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즉 인간의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자극을 많이 받을 때 쾌감과 고통이 인간에게 관계하지만, 인간의 모든 부분이 자극을 받을 때는 유쾌함과 우울함이 인간에게 관계한다. 다음으로 욕망이 무엇인지에 관해 나는 제3부의 정리 9의 주석에서 설명하였다. 나는 이 세 가지 이외의 어떤 다른 기본적인 정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머지 정서는 다음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세 가지 정서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에티카> 166쪽, 서광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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