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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Sep 27. 2023

스물여덟번째 길.  말 없는 이야기

우리는 어찌 하면 말을 잊은 사람들과 더불어 얘기할 수 있게 되겠는가?
 - 장자 -


지금까지는 주로 일과 이야기(가상의 일)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세계의 공통적인 구성 방식에 대해서 주로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좋게 봤을 때는 하나로서의 세계가 가능한 공통의 기반을 찾는 것이었지만, 나쁘게 봤을 때는 수많은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순화시키고 획일화한 것이다.

'세계는 일들의 모임이다', '세계는 기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원자들의 모임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모든 일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일어나게 된다' 같은 일반화된 이론들은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통찰이 들어 있지만, 지나친 생략으로 인한 오해도 함께 들어 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도 빼놓을 수 없는 통찰인 것 같다.


일과 이야기라는 개념은 수없이 많고 다양한 사례들에서 공통으로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측면을 추상한 개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주 단순한 생명체들도 일과 이야기의 상호작용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 또한 그동안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일반화된 이론과 관련해 가장 오해하기 쉬운 점은 그것이 고도의 사고 능력을 통해 추상적인 언어들로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오해는 일과 이야기, 물질과 생명, 몸과 마음, 사례와 법칙, 실제와 이론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반화된 이론은 삶과 분리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의 삶에 본능적인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고 대처하는 생존의 방식'이 일반화된 이론의 뿌리가 된다. 그러한 방식은 이야기라는 가상의 일의 형태로 구체적인 물질들과 함께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인 이야기들은 어떻게 남아서 작동하는 것일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각기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다양하게 만드는 특징들이 있다. 그 특징들은 이야기들을 서로 다르게 만들기도 하고 비슷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금 일어나는 어떤 일의 특징은 전에 겪은 다른 일의 비슷한 특징을 떠올리게 하면서 지난 경험을 참고하여 반응하게 한다. 

서로 떨어져 있던 일과 이야기가 관련된 일과 이야기로 만날 수 있는 것은 공통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일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일의 진행에서 바로 쓰이지 못한 일의 요소들이 남은 것이다. 이야기는 일에서 한 발 벗어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특징들은 일의 특징들과 다를 바 없다.

'불에 닿았더니 뜨거웠다'라는 경험이 있었을 때, 몸에 남은 화상과 함께 '불의 뜨거움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같이 남았다고 하면, 그 거부감은 강렬한 결과로 발생했지만 당장 쓰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거부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번에 불에 가까워질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강한 두려움 또는 회피 반응으로 쓰이게 된다.


이때 '불의 뜨거움에 대한 거부감'은 어떤 형태로 남아 있다가 다시 작동하게 될까?

뇌의 어딘가에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은 너무 막연한 대답이다. 본능적인 회피나 끌림, 그리고 단기 기억은 신경계가 없는 생물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뇌에 있는 신경세포도 특수한 세포일 뿐이다.


'불의 뜨거움에 대한 거부감'에서 '불'은 실제의 불은 아니다. 이것만으로 뜨거운 불을 만들 수는 없다. 이 특징은 실제적인 일의 특징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된 것이지만 분명 실제적인 특징에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일부만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불의 전체 특징(또는 불에 대한 경험의 특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제 특징과 전혀 다른 성질의 특징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적인 일과 가상의 일인 이야기는 이렇게 공통의 특징들을 바탕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분리된 특징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실제적인 일을 일으킬 수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가상의 상태로 볼 수 있다. 그 가상을 우리가 알면 그 쓰임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알지 못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가상의 특징은 그와 맞는 조건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정말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실제 특징의 일부가 남아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적일 일도 가상의 측면이 있는데, 일은 확정적인 상태의 연속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시도와 확정적인 결과의 리듬으로 진행된다. 특징은 그 고유의 성격을 갖지만 그 고유함을 고집해서는 새로운 일은 진행될 수 없다. 특징들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변형되고 새로운 효과들을 발생시키기 위해 불활실하게 번져 나간다. 일의 시도는 실현에 가까워진 가상이다.


일과 이야기는 별개의 일이 아니고, 일 속의 특징과 이야기 속의 특징은 별개의 특징이 아니다. 그래서 물질과 생명, 사례와 법칙, 실제와 이론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같이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일과 이야기를 다양하게 만드는 고유한 특징들은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특징들과 만나고 변형되고 다른 특징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새로운 일과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이러한 다양함을 불러오는 일의 요소를 앞으로는 '특징'이라는 말 대신에 '내용'이라고 부르려 한다. 고유함을 강조하기 위해 특징이라는 말을 썼지만, 일 속의 특징은 고유함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특징으로의 전개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특징의 전개나 진행보다는 내용의 전개와 진행이 더 어울리기 때문에 내용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이다.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질료를 구체화하고 특징적으로 만드는 '형상'처럼 일과 이야기를 바로 그러한 특징으로 규정하는 요소들을 말한다(그러나 일은 질료의 유연함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성이 포함된 개념이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일과 이야기는 있을 수 없기에 일과 내용은 질료와 형상처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내용을 함께 말하지 않는 일과 이야기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개념이 맞다. 

내용은 다름의 기준이면서, 같음의 기준이기도 하고, 또 변화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름과 같음을 판단하는 것은 일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일이다. 내용은 일의 중요한 요소로 일 안(內)에 언제나 포함되어 있다. 




통발이란 것은 물고기를 잡는 기구이지만,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란 것은 토끼를 잡는 기구이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이란 것은 뜻을 표현하는 기구이지만 뜻을 표현하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우리는 어찌 하면 말을 잊은 사람들과 더불어 얘기할 수 있게 되겠는가?*



*장자, 김학주 옮김 <장자> 661쪽 '외물'편 중에서, 연암서가, 2010.

**(대문사진) 빛의 벙커  <칸딘스키,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 전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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