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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Aug 08. 2023

스물다섯번째 길. 도약하는 차원

'주체'는 항상 '자기 초월적 주체'의 생략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


일에 치이다가 갑자기 자유로운 시간이 생겼을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여유를 즐긴다. 

편안한 휴식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가보고 싶은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 새로운 만남과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못봤던 드라마나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책을 읽거나 다양한 취미 활동도 할 수 있다. 

자유를 활용하는 방향에도 공통점이 있고, 자유를 제한하는 방향에도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방향, 새로운 일이 향해 갈 수 있는 방향을 일의 연결 방향들 또는 일의 차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많은 독재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의 부당한 억압들이 있다. 그들은 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게 이동을 제한한다. 그리고 시간을 빼앗아 체제를 위해 일하게 만든다. 취향의 자유는 무시되고 체제를 위한 것이 곧 선하고 좋은 것이 된다. 사상과 생각도 정해진 세계관으로 세뇌시킨다. 그리고 역사는 정당화를 위해 선별되고 수정되어 기록된다. 

그래도 그들이 알려주는 교훈이 있는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절실하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강렬하지만 한계 안에 있던 뚜렷한 현실은 일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네 측면으로 한계에서 벗어나 도약한다. 

먼저 뚜렷한 자리를 벗어나서 다른 일의 결과들을 만나는 '공간의 도약'을 한다. 세계는 단일한 일이 아니라 여러 일들의 모임이다. 다수의 다양한 일들이 각자만의 사적인 영역이 있어야 여럿일 수 있지만, 새로운 일을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한다.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사적 영역을 만드는데, 이렇게 새로운 사적 영역이 연달아 생기기에 공적인 영역인 공간이 발생한다. 우리 의식에 나타난 거시적 공간은 사실은 가까운 만남의 도약들을 거치며 발생한 효과이자 가상이다. 


물론 그런 가상도 일의 일부로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는 가상의 차원으로도 도약할 수 있다. 

의식에 나타난 공간은 정신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수집된 정보들을 이용해서 가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일에서는 주어진 내용으로부터 관련된 내용으로 뻗어나가는 '상상의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 

물질적인 일에서도 미약하지만 이런 상상으로의 도약이 있었기 때문에 우주는 원시 상태 그대로를 되풀이하지 않고 새로운 일들이 발생해 왔다. 

현실의 뚜렷한 내용은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는 희미한 내용으로 퍼져가고 만남을 거듭하며 혼란은 점점 더 커져 간다. 그리고 전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는 혼란 속에서 희미하게 등장한다. 

물질적인 일에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차원이 있다.


일에서 새롭게 등장한 희미한 도약들이 현실적인 뚜렷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어렴풋한 아이디어로만 남을 것이다. 일은 여러 다양한 시도들을 뚜렷한 결과 또는 못다 이룬 결과로 보존하며 다음 일을 도모한다. 

결과에서 시도를 거쳐 새로운 결과를 맺는 것은 '시간의 도약'을 만든다. 희미하던 미래를 뚜렷하게 하고, 사라지는 과거를 기록한다. 

일이 기록된다는 것은 뚜렷함으로서가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된 이야기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이야기 또한 또다른 차원의 결과로 다음 일을 도모한다. 역사의 기록들은 새로운 일들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일은 기존 안내자의 도움을 받는 한편 다양함과 확고함이라는 기준에 따라 자체적으로 평가하고 선별하는 '미적인 도약'을 한다. 

가치를 평가하는 미적인 도약은 일에 능동적인 성격을 도입하고 기록과 함께 안내자로서 역할을 한다. 미적인 가치평가는 지금의 일의 진행에서 생성된 효과이면서 일의 결과로 남아 다음 일에서 작용한다. 

지난 일의 기록은 모든 시도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중요성에 따라 가치평가된 기록이다. 기록과 가치평가의 밀접한 관계는 생명체의 본능과 기억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렬한 평가일수록 강렬하게 남아서 쓰인다.


일이 나아가는 이 네 가지 측면의 도약들은 인간적이고 의식적인 도약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있는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일의 도약들이다. 돌에도 도약할 수 있는 차원이 있고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준비가 안되었을 뿐이다.

일의 차원은 시공간의 4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에서 분리된 가상의 이야기 차원, 가상을 다시 뛰어넘는 상상의 차원, 평가를 통한 가치의 차원 모두 일을 통해 도약할 수 있는 차원들이다. 

우리는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차원에서 살고 있다. 시간의 끝자락에 있어도 다시 도약하기 때문에 시간의 한계를 경험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공간, 상상, 가치의 차원도 조건에 매달려서 한 걸음씩 다시 도약한다. 




시간을 떠나서는 목적, 희망, 공포, 힘과 같은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해진다. 역사적인 과정이 존재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지금의 그것, 즉 단순한 사실이 되고 말 것이다. 생명과 운동은 사라진다. 공간을 떠나서는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공간은 도달의 정점을 표현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실현의 복합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사실로서의 성취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주를 이행의 정수와 성취의 매듭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내 준다... 마지막으로 신성이 있다. 그것은 중요성, 가치, 그리고 현실적인 것들을 초월하는 이상 등을 가능케 하는 우주 내의 요소이다.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성의 이상들과 공간적인 직접태들과의 연관에 의해서인 것이다.**



*화이트헤드, 오영환 옮김, <과정과 실재> 91쪽, 민음사, 1991.

**화이트헤드, 오영환 문창옥 옮김, <사고의 양태> 205쪽, 도서출판 치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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