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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뽀로리 Aug 04. 2022

원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새싹 UX Researcher의 직업 일지!





꾸준히 연습하면 등단작가로 만날 수도 있겠다.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고 예상도 못하던 대학생 때의 일이다. 들은 지 10년은 더 된 칭찬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당시 나는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 중이었고, 등단을 위해 불철주야 애를 쓰고 있었다. 문학 깨나 아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이름을 들어본 작가님의 스터디였다. 운 좋게 소설반에 들어갈 수 있었고, 2년 동안 작가님과 함께 글을 쓰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나는 그 시간을 버티면 어엿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그 세계가 얼마나 치열한지도 잘 모르면서.


글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취업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다 같이 앞을 보고 가는데, 나 홀로 거꾸로 걷는 기분이란 참 묘했다. 나는 다른 동기들이 대외활동이다, 봉사활동이다 하며 스펙을 챙기던 모습을 애써 모른 척했다. 동기들과 다른 길을 갈 거니까 괜찮다고 자위했다. 이런 내 생각은 정말 소설가가 될 수 있다면 맞는 생각이기도 했다. 작가라면 다들 겪어야 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애매한 재능 때문이었다.


이 애매한 재능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던지. 적당히 글을 쓸 줄 안다는 소리는 제법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업이 아닐 때의 기준이었다. 장편소설을 쓸 깜냥은 되지도 않아 단편들만 우수수 적어 댔다. 어중간한 재능으로는 등단은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늘 결과는 낙선이었다. 낙선,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이 세 단어로 만든 문장을 2년 동안 참 많이도 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4학년이 되었다. 낙선 인이란 타이틀은 지워지는 법이 없었다.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때였다. 취업 준비가 바짝 되어있을 리는 없었다. 동기들은 저마다의 살 길을 찾아 떠났다. 내게는 대학원에 진학하겠단 막연한 계획만 있었다. 심리학이란 전공을 좋아했고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었으니까.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으면 전공 살려 취업하기 어렵대. 선배의 말을 참 미신 같이도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도피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애써 좋은 이유를 찾아 붙여 놨어도 참 모양새가 남루했다. 


내게는 돌다리를 두드려보는 습관이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많이 고려해보자는 게 내 지론인데, 이때에는 무모하게 진학을 선택했다. 급하게 전공 교수님들에게 컨택을 넣었고,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내 선택이 부주의했다고 생각한다. 돌다리를 두드려 볼 생각도 않고 발부터 뻗다니.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런 결심을 쉽사리 한단 말인가? 


하지만 때로는 우연히 건넌 돌다리가 가라앉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다. 대학원 진학이 내 생에, 그리고 내 직업에 참 많은 영향을 주었다.





터닝 포인트를 이렇게 쉽게 결정했다고 말해도 되나?


생물 심리학이냐, 인지 심리학이냐. 대학원 합격 메일 두 개를 놓고 많이도 고민을 했다. 학부 교수님들을 찾아가 함께 고민해달라 떼를 쓰기도 했다. 친한 동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비슷한 조언을 해주었다. 나중에 계속해보고 싶은 쪽으로 선택해.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나중에 해보고 싶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 피곤한 인간인데, 참 전공이랑도 잘 맞았던 것 같다.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와 ‘왜’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인지심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기어코 대학원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나의 불확실성은 여전했다.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소설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랩실 생활을 최선을 다하며 했다. 공부와 실험, 프로젝트에 모두 몰두했다. 대학원에 있는 2년 동안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가져가고 싶었다. 그 시간 동안에는 내 미래 청사진을 잠시 접어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는 날 깨닫게 되었다. 아무래도 소설가가 되기는 그른 것 같다고. 나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UX 교육을 들은 건 순전히 동기 덕분이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선배들이 이쪽으로 많이들 일하곤 한다.’ 정도가 전부였다. 대단한 이유가 없었기에 큰 고민도 없었다.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이유를 붙여서는 지원서를 작성했다. 이후 나는 6개월 동안 교육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직업에 대한 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소설가 말고, 정말 내가 될 수 있는 직업 말이다.


첫 직업은 기획자였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모바일 서비스를 기획하고 론칭하는 건 많은 공수가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운이 좋게도 나는 내가 만든 서비스의 FGI를 진행해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전공을 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나는 랩실 생활과 교육을 받던 때를 더듬어가며 FGI를 진행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FGI는 정신이 없고, 해본 적도 없고, 바쁘기도 바빴다. 이 과정 속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왜’를 고민하는 일이 내게 활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사용자가 인지하지도 못한 보이스를 끌어낼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을 쉽게 전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질문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좋았다. 화면을 만들고 실제로 서비스를 구현해 낼 때보다 기쁘기도 했다. 그래서 퇴사를 결심했고, 이직을 했다. 기획자를 벗어나 UX Researcher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게 현재의 나다.






어쩌면 이 길이 내 적성일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 속단을 할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미래가 (사용자의 보이스처럼) 마음속에 아직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보내준 소설가의 꿈처럼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내 일이 즐겁다. Why를 고민하고 있다 보면 시간이 잘도 간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론하는 일이 좋다. 더 배우고 싶다. 더 듣고 싶고,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느낀다.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더 성장하고 싶다.


각박하고 팍팍한 먹고사니즘의 세계에서 일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조망해보면 퍽 운이 좋기까지 하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맛집인 기분이랄까. 이제는 우연이가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내 일을 좋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홀가분하게 소설가로서의 나를, 기획자로서의 나를 잘 보내 줄 수 있다. 내가 UX Researcher로서의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수히 많아서. 아직 이유를 더 발굴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의 직업을 좋아하고 있기에 꾸준하게 기록을 남겨 놓으려고 한다. 아직도 과거에 써 둔 소설을 보면 기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중의 내가 지쳤을 때, 다시 보며 활력을 얻고 싶다. 그리고 혹시 이 일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에게 아주 미세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 대단한 업무적 조언이 아니더라도 내가 겪은 일을 말하고 나누면 조금의 위로라도 될지 누가 안 단 말인가. 내가 처음 대학원 전공을 선택했을 때처럼 말이다. ‘나중에 해보고 싶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정도의 가벼운 고민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소설가가 되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UX researcher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직업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정도면 내 직장생활 첫 문장으로 적어 두어도 좋을 것 같다.







반갑습니다!

일을 하며 스스로 느꼈던 일들을 나누고 싶어 첫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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