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재 Jul 26. 2021

사람들의 역량을 확장하는 것이 자유의 확장이다

<천관율의 줌아웃>, 천관율

*2018년 어느날에 썼던 글을 이제서야 발행



발췌 및 단상


공정에 대한 감각의 진화적 기원은 속임수 탐지 기능으로 알려져 있다. 상대가 나를 속이는 사실을 알아채야 살아남을  있는데, 이를 위해 공정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졌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무임승차와 같은 속임수를 치해선  생존(때로는 내가 속한 집단의 생존) 위태롭다.  공정이란 평등 애호가 아니라 일종의 속임수 탐지-징벌 매커니즘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공정을 감지했을  화를 내고, 자기 손해를 감수하며 최후통첩을 거절하고, 단일팀에 악플을 단다. 실수를 알아차린 이후 조너선 하이트는 공정을 측정할  비례 원리만 적용하고 보편 원리는 아예 빼버렸다. 이것은 비례 원리가 논리적으로  타당한 공정성의 기반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뇌는 공정을 평가할  직관적으로 비례 원리에 기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발생할 때조차도 그렇다. (p.348)

일의 특성상 종종 심사하는 입장이 될 때가 있다. 선발되는 이들에게 큰 혜택이 돌아가는 자리일 수록 토의 과정이 치열한데, 그때마다 번번이 외적/내적 갈등을 일으키던 공통요인이 있었다. 이번에 책을 읽고 나서야 갈등이 촉발되는 지점이 '비례 원리를 따르는가, 보편 원리를 따르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베는 지독한 '구조맹'이 된다. 여성의 유리 천장도, 호남의 지역 차별도, 일베의 눈에는 구조적 불리함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 부족이 된다. 사회구조 차원의 유불리를 인정하지 않으니, 소수자에게 주는 지원은 권리가 아니라 무임승차다. 구조맹의 항의는 국가를 향하는 법이 없다. 김학준은 논문의 결론을 "일베 이용자는 근대 한국 체계가 가장 성공적으로 산출해낸 통치 대상이다."라고 내렸다. 국가는, 오직 국가만이 지나치게 성공을 거두었다. (p.257)

비단 일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 지나치게 줌인 되어 있는 렌즈를 뒤로 좀 뺄 필요가 있다.



지금 터져나오는 공정의 정신을 끝까지 밀고 가면, 현재 상태가 정당하며 모든 재분배는 불공정하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원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는 개혁은 없다. 정부가 무슨 정책을 내놓든 현상 변경 시도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전부 불공정 딱지가 붙을 때 정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p.351)

언젠가 관율님이 (어떤 시즌이었는지는 기억 안 남.. 너무 많이 했어..) 민주주잉 모임에서 '내가 보수주의자라면 지금 터져나오는 공정성 이슈를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생각났다.



대체로 보수주의자들은 비례 원리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진보주의자들은 보편 원리에 상대적으로더 기운다. 이말은 진보주의자들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기회의 평등을 좀 더 폭넓게 해석한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진보주의자들은 재능과 운의 분포가 불균등하다는 현실에 좀 더 민감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데 더 관대하다.(p.359)

내가 가장 가깝게 체감하며 동의하는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분류법.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직관적이면서 통찰력 있는 표현으로 압축했다. "불평등과 지배가 없으면 자유의 문제는 없다. 평등이 기본이다." "평등을 강조할 수록 생존권 차원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가 신장되는 것이다." 이 말은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티아 센을 떠올리게 한다. 센은 "빈곤은 단순히 낮은 소득이 아니라 기본적 역량의 박탈이다. 사람들의 역량을 확장하는 것이 자유의 확장이다"라고 주장한다. 평등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무현은 진보주의자의 핵심 질문이 이것이라고 믿는 지도자였다. (p.364)

센의 말에 백 번 공감. 나 역시 빈곤은 단순히 자산,소득 수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역량을 확대할 가능성과 기회가 유연하게 제공되는가, 실제로 그 기회를 타고 내 사회적 신분,소득 수준,처우 등을 획기적으로 변동시킬 가능성이 작게나마 열려 있는가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주위 친구들을 살펴봤을 때 자기 역량을 확장할 기회와 가능성이 보장받는다고 느끼는지 여부가 스스로를 빈곤/중산층 중 어디로 분류하는지 가르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었다.



연대가 사회의 구성 원리로 뿌리내린 곳에서는 여러 세대의 노력 끝에 이러한 조건들이 갖춰졌다. 유럽 복지국가 시민들은 우리 눈에는 터무니없는 세금 부담을 별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공공재 게임에서 10만원 중 대부분을 기부하는 게임 참가자와 같다. 신뢰와 공동체 의식과 감시와 처벌을 축적해온 공동체의 역사가 일종의 보증을 선다. (..) 당신이 고소득자라면 돌아오는 돈이 낸 돈보다 적을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안정되고 지속 가능해진다는 무형의 이득은 낸 돈 이상으로 크다. 당신이 고소득자일수록 사회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은 비싼 가치를 갖게 된다.(p.368)

뼈아픈 문장. '공동체의 역사가 보증을 설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작동하는 공공재 게임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쯤? 그 순간이 닥쳤을 때 나는 내가 가진 10만원에서 얼마까지 낼 의향이 있는가?  이 사회를 하나의 팀으로 봤을 때 나는 우리 팀원들이 최소한 얼마 이상을 낼 것이라고 믿겠는가? (+민주주잉에서 늘 등장하는 단골 질문: 어디까지를 '같은 팀'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이 싸움은 2016년의 촛불과 다르다. 이것은 서로가 더 낫다고 믿는 아이디어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싸움이다. 패배한 쪽이라도 얼마든지 재도전의 기회가 있는 싸움이다. 그래서 이것은 일생일대의 단판 승부가 아니라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싸움이다. 선악이 아니라 의견차이를 다루는 싸움이다. 우리는 이런걸 민주주의라고 부른다.(p.370)

민주주잉 클럽을 몇 시즌 째 하며 거둔 가장 큰 수확을 꼽으라면 민주주의가 이러한 '일상의 싸움'임을, 끝없이 되풀이되며 결과 역시 끊임없이 바뀔 것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



제국의 부담은 장기적인 것이지만,
민주주의는 시간이 없어서 언제나 서두른다.
- 마이클 이그내티에프




연관도서/추천도서

<천관율의 줌아웃> 책에 언급되었거나 관련하여 추천받은 책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읽을 책들

<덫에 걸린 유럽>, 클라우스 오페

<남성과잉사회>, 마라 비슨달

<옳고 그름>, 조슈아 그린

<정의론>, 롤즈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조지프 히스


읽은 책들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포퓰리즘의 세계화>, 존 주디스

<진보의 미래>, 노무현

<계몽주의 2.0>, 조지프 히스

<정치의 공간>, 최장집


작가의 이전글 이 더위는 누군가에게는 낭만,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