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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찬 Oct 21. 2024

자아라는 신, 브랜드라는 성물

<브랜드는 종교다> 시리즈 1

이번주 연재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간 브랜드 컨설팅 회사의 실무자로서 지식을 나눴다면, 이제는 신학을 전공한 브랜드 컨설턴트로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제가 억지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그 사이 시간의 경계선들을 지나, 브랜드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안에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있나봅니다. 브랜드 세계를 종교성의 시각에서 자꾸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루마니아의 세계적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야데의 어깨에 앉아 이 시대의 브랜드 다이나믹스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첫번째로, 자아와 브랜드의 관계를 서술하려 합니다. 이 주제는 저의 사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라 지속적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 중심의…자아 폭발의 시대


이 시대의 많은 메세지는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신이 될 것만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애플 제품을 쓰면 내가 창조자(creator)가 된 것과 같은 기분을 주고, 나이키는 내가 위대한 성취자(achiever)라고 소리치며, 롤스로이스는 나에게 최고의 권력자(Leader)가 될 수 있음을 속삭이죠.


‘나’ 중심의 이러한 메세지들은 자아 폭발을 더욱 가속화합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 자아 폭발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들입니다. 브랜드는 자아를 숭배하게 하는데 까지 쉽게 나아가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브랜드는 자아라는 교주의 성물이 되어가고 있죠.


저의 이야기가 조금은 극단적으로 들리시나요?


비종교적 시대의 브랜드라는 종교


근대 사회 이후 인간은 종교성을 감추려고 애써오고 있습니다. 비이성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죠. 종교적인 것들은 과학적인 것에 대비 되며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상에 대해 루마니아의 종교사학자 엘리야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역군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을 향한 모든 호소를 거절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인간 조건의 바깥에 있는 인류를 위한 어떤 모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그 자신을 완전하게 만든다. 거룩한 것은 그의 자유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오로지 그가 전적으로 비신화화될 때에만 그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을 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성과속: 종교의 본질> p. 180)


엘리야데의 말 처럼, 근대 이후 인간은 초월을 향한 호소를 거절하고 자신에 집중합니다. 엘리야데의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든다”는 현대 사회를 꿰뚫는 명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1900년대 초반에 이러한 글을 썼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은 여전히 우리를 전율케 하죠.


한편 엘리야데는 해당 문장을 통해 종교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에 대해 역설하려고 했지만 저의 생각은 조금 달라요. 인간이 신을 멀리하고 나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나’를 신이 되게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내가 창조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세계를 나의 의미 체계로 ‘창건해간다’는 의미이죠. 반면 일반적인 종교는 해당 종교의 의미 체계를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종교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몸부림은 결국 나를 숭배하는 종교적 모습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상업적 브랜드에 대한 애정은 우리에게 여전히 종교적 인간임을 증명합니다. ‘나’라는 신이 더욱 강해지도록 돕는 도구로서 브랜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브랜드는 비종교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갖는 종교적 조각들입니다. 


투명 사회에 여전히 신비로운 것


현대인들이 여전히 종교성을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종교가 갖는 또 다른 특성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마력인 ‘신비로움(Mystery)’입니다. 종교는 커튼 뒤에 무엇인가를 항상 감추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커튼을 걷히고,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밝히려고 애써 왔습니다. 종교라는 커튼 뒤에 무엇이 있는지 파헤쳤습니다. 과학을 통해 미신을 규명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그러한 것의 일환이었죠. 곳곳에서 종교와 인간의 종교성을 발가벗기려는 시도는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투명해진 인간은 다시 신비로움을 입고싶어 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옷을 입는 것에 있기 때문이죠.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결국 다시 그 커튼 뒤를 갈망합니다. 투명한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끼죠. 감춰진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이 되어가죠. 다만 ‘자아’라는 신을 곁들인.‘ 이러한 ‘호모 렐리기우스’라는 현대 인간은 끊임 없이 브랜드라는 성물을 찾아 헤맵니다.


첨언할 것은 근대를 지나 지금의 현대에서까지 종교적 인간이 발가벗겨지고 투명해졌다라는 것은 사실 착각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적 인간은 여전히 투명해지지 않았죠. 여전히 전 세계의 현대인 중 약 84%는 종교를 믿는다는 사실에서도 그 시도는 온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잇어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말에 동조되어 커튼을 막 휘둘러도 그 뒤의 공간은 인간에게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존재하는 것이죠. 검어요.


엘리야데의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일련의 부정과 거부에 의하여 그 자신을 형성하지만, 그가 거부하고 부정한 실재들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닌다.”(<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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