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는 종교다> 시리즈 2
신학을 전공하고, 그 사이 시간의 경계선들을 지나, 브랜드 컨설팅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안에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있나봅니다. 브랜드 세계를 종교성의 시각에서 자꾸 바라보게 됩니다. 특히 루마니아의 세계적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야데의 어깨에 앉아 이 시대의 브랜드 다이나믹스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자아 실현과 브랜드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려합니다.
‘자아 실현’은 언제나 선한 가치일까요?
“종교적 인간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기를 추구한다”(<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39)
자아 실현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엘리야데가 말하는 ‘세계의 중심’ 개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고대 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기를 갈망 해왔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했다면, 그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세계의 중심에 방문한다면, 덧 없는 세상 너머 가슴 뛰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의미는 방향성을 만들어내고, 그 방향성은 삶을 이끌어갑니다.
“미리 존재하는 방향성이 없으면 어떤 것도 시작 될 수 없고 또 성취될 수도 없는데, 모든 방향성은 하나의 고정점에 대한 요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이 언제나 그의 거주지를 ’세계의 중심’에 고정시키고자 애쓰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20)
반면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혼란합니다. 그곳은 카오스입니다. 세계의 주변부는 지루하고, 의미 없으며, 먼지와 혼돈만이 있죠. 엘리야데의 표현으로는 “유령과 마귀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멀리 보이는 긴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가까운 짧은 길만 보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그 곳에는 없습니다.
엘리야데는 고대 사회에서 세계의 중심은 ‘사원‘이라는 공간에 위치한다고 말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종교는 곧 삶이었고, 신이 거주한다고 믿어지는 사원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았죠.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사원의 상징을 논하며 경내는 지하를, 성소는 지상을, 지성소는 천상을 표현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성전 이름에는 ’두르-안-키(Dur-an-ki)‘가 붙여지기도 했는데요, 이는 천상과 지상의 연결점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캐나다 북부의 원주민인 콰키우틀족의 신입자는 “나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즉, 고대사회에서는 신이 있다고 믿어지는 사원에 세계의 중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대의 세계 중심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세계의 중심은 어디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세계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논하려면, 현대인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근대 이후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하죠. 인간은 인간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역군으로만 간주합니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시대입니다. (지난 관련 글 읽기)
이러한 시대에 현대인의 사원은 어디있을까요?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현대인의 사원은 바로 ‘자아’ 안에 있습니다. 근대 이후 신이 없다고 여기는 인간,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창조해야만 하는 인간. 그 인간의 가장 거룩한 장소. 그곳은 자아입니다. 현대 인간은 세계의 중심을 직접 창건합니다. 내 안에요. 고대에는 ‘신의 뜻 실현’이 세계의 중심에 있었다면, 현대에는 ‘나의 뜻 실현’이 세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자아는 파괴, 해체, 죽음의 신 없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공간입니다. 그 세상에 맞서 ‘나’라는 신을 만들어 내고, 결국 신이 거주하기에 가장 거룩한 공간이죠.
잠시만요, 정말 그 곳은 거룩한 공간일까요?
“참다운 세계는 언제나 가운데에, 중심에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 지평의 돌파와, 세 가지 우주적 지대간의 상호교섭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성과속:종교의 본질, p.39>
엘리야데는 거룩한 장소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거룩한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에 단절을 가져온다. 둘째, 이 단절은 하나의 우주적 영역에서 다른 영역에로의 이행(천상에서 지상으로)을 가능케하는 출구로서 상징된다. 현대 사회의 자아를 이러한 사원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엘리야데의 두 가지 주장에서 모두 배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자신의 자아를 사원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은 공간의 균질성에 단절을 가져오지 않죠. 자아에서 자아로의 이동이며, 곧 제자리 걸음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동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또는 지상에서 천상으로의 이동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지상에서로의 수평적 이동이죠. 즉, 고대 사회의 사원이 보여주었던 수직적 소통의 장으로서의 역할이 현대 사회의 자아 사원에서는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결국은 인간은 땅의 존재이기에 세속적일 수 밖에 없는 공간. 자아는 세속적인 사원입니다.
사원에서는 예배가 이뤄집니다. 자아 사원에서는 나에 대한 예배가 이뤄집니다. 내가 가장 높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브랜드라는 성물은 필수입니다. 신 없는 세상이지만 신이 됩니다. 세속화 된 신적 가치를 제공하는 브랜드를 통해 말이죠. 노동을 자신의 발 밑에 두려는 것이며, 계급을 자신의 발 밑에 두려는 것이며, 세상을 자신의 발 밑에 두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멋진 가수 브랜드, 내가 가장 위대한 권력자가 될 수 있다고 속삭이는 자동차 브랜드, 당신의 영혼을 한 단계 높여준다고(Uplift) 말하는 리조트 브랜드…
신 없는 세상에 신이 된 자아는 브랜드를 계속하여 삼킵니다. 그리고 그 삼킨 것은 영양이 되어 자아의 의미 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브랜드를 갈망하는 과정은 결국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해결 과정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자아 실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외로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 <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27, 멀치아 엘리야데
** <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39, 멀치아 엘리야데
*** <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37, 멀치아 엘리야데
**** <성과 속: 종교의 본질> p. 39, 멀치아 엘리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