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전기, 화학물질 축소하기
얼마 전까지 하던 일은 노인을 대상으로 면담하는 시간이 많았다. 나보다 인생을 두 배 이상 더 살아온 70~80대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나에게는 선대의 삶을 흘끗거릴 수 있던 흔치 않고 값진 시간이었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살필 수 있었던 덕목은 바로 소박함이었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와 직접 잡아 올린 생선으로 꾸려진 밥상, 많아야 한 달에 한 두 번인 외식부터 손빨래까지. 어르신들은 대부분 관절이 좋지 않은데 80대 할머니들 중 굽은 손가락으로도 손빨래를 꾸준히 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면담할 때 손빨래라는 단어를 연거푸 듣다 보니 새파랗게 젊은 내가 못 할 것은 뭔가,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손이 작아 내 속옷 정도는 빨겠지만, 그보다 큰 빨래는 주무르기도 짜기도 힘들어 손빨래해야 하는 옷이더라도 무조건 세탁기를 돌린다. 가령 스웨터라던가 코트(;;)도 망에 넣으면 괜찮을 걸로 생각해서 세탁기에 돌려버린다. 정 찝찝하면 (화학적인 냄새가 싫어 웬만하면 맡기지 않는)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던지, 나와 달리 물건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손가락이 굉장히 긴 남편에게 손빨래를 부탁한다. 하지만 할머니들과 이야기하다 왜 그런 바람이 불었는지 문득 나도 손빨래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매일 하면 큰 부담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하루치 빨래만 시도해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돌리는 세탁기를 안 써도 되니 그만큼 전기세도 아낄 것이고, 물도 세탁기보다는 덜 쓸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비벼가며 세탁하는 게 어쨌든 때가 더 잘 지워질 테니, 이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나만 손빨래에 취미를 들인다면 말이다.
첫날 나온 세탁물은 수건 두 장, 남편과 나의 하루치 속옷, 양말 네 개, 히트텍 상의, 천 냅킨 두 개였다. 사은품으로 받아 2년째 크기가 그대로인 세탁비누를 이제야 제대로 사용했다.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작은 플라스틱 빨래판도 구비되어 있었다. 첫날은 할 만했다. 히트텍 상의에서 구정물이 그렇게나 많이 빠질 줄이야. 적잖이 당황했지만 역시 손빨래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헹궈도 비눗물이 계속 나와 다음 날부터는 세탁비누를 덜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날, 어제와 비슷한 구성에서 남편의 후드티와 카고 바지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나는 손빨래 취미를 그만둬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후드티와 카고 바지는 속옷이나 냅킨, 히트텍과 차원이 달랐다. 물이 닿으면 엄청나게 무거워지는 데다가 어찌어찌 빨래를 했다 쳐도 짜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짜지 않고 널어 말리니 섬유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빨래는 손으로 해도 탈수할 때만 세탁기를 돌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일주일에 두 번 돌리는 세탁기의 횟수를 줄여보고자 매일 손빨래를 하기로 했는데, 매일 탈수 모드만이라도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또, 수건은 몸 한 번 닦은 것에 비해 들이는 노동이 너무 큰 것 같았다. 수건도 물이 닿으면 생각보다 무거워지는 데다가 구정물이 잘 나오지도 않아 영 손빨래할 맛이 안 났다.
이틀 해보고 손빨래 규칙을 세웠다. 내가 짤 수 있는 부피의 옷만 손빨래할 것. 무엇보다 꾸준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속옷, (마치 반바지와도 같은) 남편 속옷, 입에 닿는 천 냅킨, 면 마스크, 손수건, 히트텍이나 러닝 같은 가벼운 내의만을 골라 이틀에 한 번씩 손빨래를 시작했다. 이틀의 한 번이라는 규칙도 괜히 정한 것은 아니다. 사실 손빨래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샤워할 때 뜨거운 물이 나오기 전에 어쩔 수 없이 흘려보내야 하는 차가운 물을 어떻게든 재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물을 양동이에 모아놨다가 손빨래를 하니 안성맞춤이었다. 집에는 양동이를 포함해 대야가 세 개 있는데, 두 명이서 세 번의 '샤워 전 물'을 모으면 이틀 정도 걸린다. 세탁비누는 아무래도 헹구는 데 물이 더 많이 드는 것 같고 잔여 비누가 남는 느낌이라 더 친환경적인 소프넛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 개의 대야에서는 빨래 - 헹굼 1 - 헹굼 2 방식으로 손빨래가 진행된다. 우선 물을 채운 첫 번째 대야에 빨랫거리와 망에 넣은 소프넛(대략 한주먹, 15~20개)을 넣고 불린다. 30분 정도 지나면 소프넛도 적당히 말랑해지고 눈에는 안 보이지만 빨래의 때도 적당히 불 것이다. 빨래판에 소프넛 망과 함께 빨래를 벅벅 비벼 세탁한다. 이때 조금만 비벼도 거품이 많이 난다. 세탁물과 함께 비비지 않고 소프넛 망을 물 안에서 조물거리기만 해도 거품이 잘 난다. 거품이 적당히 대야에 차오르면 소프넛 망은 미리 빼도 좋다. 이렇게 사용한 소프넛은 거품이 잘 안 나올 때까지 사용한다. 나는 한 네 번 정도 사용한다. 물이 담긴 헹굼 대야에 빨래를 좀 짜서 옮겨 넣고 머리 감듯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마구 헹군다. 이후 다른 헹굼 대야에 옮겨 한 번 더 헹굼을 반복한다. 꼭꼭 짜서 바람이 잘 통하거나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넌다.
지금은 이 방식에 정착한 지 3개월은 된 것 같다.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세탁기 세탁이 한 번으로 줄었으며 샤워하기 전에 나오는 차가운 물을 알뜰히 쓰고 있다. 세탁기를 일주일에 두 번에서 한 번 사용한다고 전기세를 크게 아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갗에 닿는 옷들이 더 깨끗이 친환경적으로 세탁된다고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다. 아무래도 세탁기는 조금만 쓰면 세탁조에 곰팡이나 먼지가 많이 껴 세탁물에 조금씩 묻어 나와 조금 찝찝하던 터다. 지금은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 가벼운 손빨래를 별 스트레스 없이 한다. 찾아보니 은근히 더 많은 양의 손빨래를 하는 고수들이 많았다. 얼마 전 큰 대야를 사서 남편과 발로 밟아가며 이불 빨래도 했다. 순전히 우리 집 세탁조와 빨래방 세탁조의 청결을 믿지 못해서 선택한 자발적 노동이었다. 힘들었지만 내 기분과 빨래만큼은 더없이 상쾌하고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