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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생긴 일 7. 포르모사에서 한국인이라는 건

[아르헨티나, 포르모사]

by 이다예

광란의 파티로 밤을 새우고 한껏 휴식을 취한 뒤, 어슴푸레 해가 질 무렵 우리는 포르모사 구경을 했다. 서늘해진 날씨에 강가에서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던 중, 바네사의 친구 네 명이 수줍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이들은 전부 한국 문화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었고, 그렇게 나의 팬미팅 비스무리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부끄럽다며 말 꺼내기를 서로 미루던 네 명의 소녀들은 우리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자리를 잡자 슬그머니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에 다양하게 관심이 많던 그들은 ‘최애 아이돌 그룹’조차 각기 달랐다. 웬만한 한국어 인사는 당연히 할 줄 알았고 이 중 두 명은 한국어를 꽤나 수준급으로 구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인을 만나보는 건 내가 처음이라고. 내 존재가 무슨 천연기념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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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아르헨티나는 그 명성에 걸맞게 한 스쿱 한 스쿱이 굉장히 거대했다. 그걸 겨우 다 먹은 후 우리 8명의 거대 군단은 정처 없이 길거리를 떠돌았다. 그러다 로베르토가 어떤 구멍가게에 들어가 맥주를 커다란 병으로 두 개 사서 나오더니 가게 앞에 덩그러니 놓인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마치 우리나라 호프집 야외석 같은 그 느낌이 너무나도 정겨워 웃음이 나왔다.


약간의 어색함이 동반된 인터뷰 자리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수능, 교복 등 학교생활에 관해 이것저것 정말이냐고 질문 공세를 던졌다.


“맞아, 한국의 고등학교 생활은 정말 악명 높아서… 그때의 끈끈함 덕분인지 지금도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각별해.”


나의 말에 미카가 입을 떡 벌리더니 반문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아직도 친하다고? 여기선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고등학교 애들은 서로 생존 여부도 몰라.”


다른 친구들도 미카의 말에 동의했다.


“애초에 학교 자체를 잘 안 가서 그런 것 같아. 우린 출석체크가 없어서 매일같이 학교 땡땡이를 쳤거든. 선생님들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고. 포르모사가 교육에 유난히 무심해.”


“학교를 안 가면 그 시간엔 뭘 하는데?”


“글쎄,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영화관도 가고. 아, 포르모사엔 도시를 통틀어서 영화관이 딱 하나밖에 없다? 신기하지. 그것도 최근에 리모델링해서 드디어 첫 에스컬레이터가 생겼어.”


“헐, 그럼 전엔 에스컬레이터를 본 적이 없었어?”


“응, TV로만 봤지. 여긴 맥도날드도 없고 스타벅스도 없어. 한 번도 안 먹어봤어. 한국 음식점도 당연히 없고. 케이팝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어서 앨범이나 굿즈 같은 거 사기도 힘들어. 어렵게 직구하는데, 세관이 까다로워서 걸리는 경우도 많아서 파라과이로 배송받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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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머나먼 작은 마을에서 우리나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여행을 마치면 한국에서 직접 앨범과 굿즈를 구해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각자의 최애 그룹명을 받아 적었다.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 없다는 말도 마음에 걸려서, 로베르토에게 다음 날 점심으로 요리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대가족인 덕분에 이웃들 몫까지 8인분 볶음밥을 만들어야 해서 긴장됐지만. 우리는 아침 일찍 장을 간단히 본 후, 공원에 앉아 떼레레(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일부에서 즐겨 마시는 차가운 마테차)를 나눠 마시며 마지막 수다를 떨었다.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무더운 날씨에 마시는 떼레레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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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 볶음밥을 요리하는데 엄청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엠마누엘과 바네사는 재료 손질을 열심히 도왔고, 로베르토와 사무엘은 흥미롭게 지켜보며 영상 촬영을 하기에 바빴으며, 로베르토의 어머니는 나를 못 미더운 식으로 바라보셨다. 다행히 무사히 완성된 볶음밥은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나는 들고 다니던 간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놀라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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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따뜻한 분위기에 한껏 취해버린 후 포르모사를 떠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의 마스크팩을 바네사와 어머니에게 건네자, 어머니는 로베르토가 일러준 간단한 영어로 떠듬떠듬 작별인사를 고하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나머지 가족은 나를 버스터미널까지 줄줄이 따라와서 안전하게 버스를 찾아 태워주느라 부산을 떨었다. 아르헨티나는 버스에 짐을 실으며 기사에게 팁을 주는 게 관례인데, 나를 재차 만류하곤 기사에게 직접 팁을 건네는 바네사를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버스 맨 앞자리에 자리 잡은 나를, 이들은 창밖에서 바라보며 내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주었다. 그리곤 끝없이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모습이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려서 버스 여정은 상실감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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