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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Feb 12.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7. 포르모사에서 한국인이라는 건

[아르헨티나, 포르모사]

광란의 파티로 밤을 새우고 한껏 휴식을 취한 뒤, 어슴푸레 해가 질 무렵 우리는 포르모사 구경을 했다. 서늘해진 날씨에 강가에서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던 중, 바네사의 친구 네 명이 수줍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이들은 전부 한국 문화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었고, 그렇게 나의 팬미팅 비스무리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부끄럽다며 말 꺼내기를 서로 미루던 네 명의 소녀들은 우리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자리를 잡자 슬그머니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에 다양하게 관심이 많던 그들은 ‘최애 아이돌 그룹’조차 각기 달랐다. 웬만한 한국어 인사는 당연히 할 줄 알았고 이 중 두 명은 한국어를 꽤나 수준급으로 구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인을 만나보는 건 내가 처음이라고. 내 존재가 무슨 천연기념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아르헨티나는 그 명성에 걸맞게 한 스쿱 한 스쿱이 굉장히 거대했다. 그걸 겨우 다 먹은 후 우리 8명의 거대 군단은 정처 없이 길거리를 떠돌았다. 그러다 로베르토가 어떤 구멍가게에 들어가 맥주를 커다란 병으로 두 개 사서 나오더니 가게 앞에 덩그러니 놓인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마치 우리나라 호프집 야외석 같은 그 느낌이 너무나도 정겨워 웃음이 나왔다.


약간의 어색함이 동반된 인터뷰 자리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수능, 교복 등 학교생활에 관해 이것저것 정말이냐고 질문 공세를 던졌다.


“맞아, 한국의 고등학교 생활은 정말 악명 높아서… 그때의 끈끈함 덕분인지 지금도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각별해.”


나의 말에 미카가 입을 떡 벌리더니 반문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아직도 친하다고? 여기선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고등학교 애들은 서로 생존 여부도 몰라.”


다른 친구들도 미카의 말에 동의했다.


“애초에 학교 자체를 잘 안 가서 그런 것 같아. 우린 출석체크가 없어서 매일같이 학교 땡땡이를 쳤거든. 선생님들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고. 포르모사가 교육에 유난히 무심해.”


“학교를 안 가면 그 시간엔 뭘 하는데?”


“글쎄,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영화관도 가고. 아, 포르모사엔 도시를 통틀어서 영화관이 딱 하나밖에 없다? 신기하지. 그것도 최근에 리모델링해서 드디어 첫 에스컬레이터가 생겼어.”


“헐, 그럼 전엔 에스컬레이터를 본 적이 없었어?”


“응, TV로만 봤지. 여긴 맥도날드도 없고 스타벅스도 없어. 한 번도 안 먹어봤어. 한국 음식점도 당연히 없고. 케이팝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어서 앨범이나 굿즈 같은 거 사기도 힘들어. 어렵게 직구하는데, 세관이 까다로워서 걸리는 경우도 많아서 파라과이로 배송받기도 하고.”



이 머나먼 작은 마을에서 우리나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여행을 마치면 한국에서 직접 앨범과 굿즈를 구해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각자의 최애 그룹명을 받아 적었다.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 없다는 말도 마음에 걸려서, 로베르토에게 다음 날 점심으로 요리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대가족인 덕분에 이웃들 몫까지 8인분 볶음밥을 만들어야 해서 긴장됐지만. 우리는 아침 일찍 장을 간단히 본 후, 공원에 앉아 떼레레(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일부에서 즐겨 마시는 차가운 마테차)를 나눠 마시며 마지막 수다를 떨었다.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무더운 날씨에 마시는 떼레레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집에 돌아가 볶음밥을 요리하는데 엄청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엠마누엘과 바네사는 재료 손질을 열심히 도왔고, 로베르토와 사무엘은 흥미롭게 지켜보며 영상 촬영을 하기에 바빴으며, 로베르토의 어머니는 나를 못 미더운 식으로 바라보셨다. 다행히 무사히 완성된 볶음밥은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나는 들고 다니던 간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놀라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런 따뜻한 분위기에 한껏 취해버린 후 포르모사를 떠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의 마스크팩을 바네사와 어머니에게 건네자, 어머니는 로베르토가 일러준 간단한 영어로 떠듬떠듬 작별인사를 고하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나머지 가족은 나를 버스터미널까지 줄줄이 따라와서 안전하게 버스를 찾아 태워주느라 부산을 떨었다. 아르헨티나는 버스에 짐을 실으며 기사에게 팁을 주는 게 관례인데, 나를 재차 만류하곤 기사에게 직접 팁을 건네는 바네사를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버스 맨 앞자리에 자리 잡은 나를, 이들은 창밖에서 바라보며 내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주었다. 그리곤 끝없이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모습이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려서 버스 여정은 상실감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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