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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Dec 23.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15.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던데

[페루, 마추픽추]

세계여행을 다니며 정말이지 ‘와, 너무 힘들어서 이러다간 죽을 것 같다’라고 느꼈던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체력적 한계를 역대급으로 경험하게 해 준 곳은 에티오피아의 다나킬 화산. 두 번째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이곳, 마추픽추였다. 이미 전날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 강행군을 하고 난 직후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귀중품을 두고 다니기 불안해서 고스란히 다 챙겨 온 배낭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한 시간 반 정도면 올라간다던 마추픽추는 내 인생 중 가장 고생스러웠던 한 시간 반을 선사해주었다. 


데이빗이 앞서가다 찍은 내 사진. 마치 지옥길을 걷는 모양새...


그 와중에 더욱 괴로웠던 건 내 고통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쉽게 저만치 앞서가는 데이빗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헬스 트레이너였고,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걷는 걸로도 모자라서 훌쩍 뛰어가기까지 했다. 두세 미터쯤 거리가 벌어지면 그는 종종 멈추어 서서 “Vamos, Sky! (가자, 다예야!)”를 외쳤다. 나의 원망 섞인 눈초리를 느끼고는 “Todo bien? (다 괜찮지?)”이라고 슬쩍 물어봐주기까지. 우리의 등산 대화 중 9할은 아마 저 두 문장이었을 거다.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사실 데이빗이 없었다면 마추픽추 정상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응원에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스페인어를 못해서 포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울며 겨자 먹기로 괜찮은 척을 해가며 우리의 행군은 계속되었고, 마지막엔 내 배낭까지 대신 들쳐 메고 이곳이 놀이터인 것처럼 뛰어가는 그의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내 가방까지 메고도 아무렇지 않게 가는 당신은... 괴물...?


정상에 도착하자 우리는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내가 신청한 투어에 영어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었던 탓에 나는 그 그룹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 뒤이어 올라온 세르히오와 (숙취에 찌든) 에제키엘을 만나 마추픽추 전망을 잠시 감상하고, 나는 홀로 영어 가이드를 따라나섰다. 


에제키엘, 세르히오와 서로 그리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북적북적 어울려서였을까, 간만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자 문득 낯설어졌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얻은 자유시간은 어딘가 어색하기까지 했다. 여기저기서 셀카를 찍고 우연히 마주한 알파카 무리 앞에서 넋 놓고 구경을 하다가, 마추픽추가 집 근처 동네처럼 느껴질 때 즈음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투어 직전에 구입한 알파카 모자는 상당한 인기템이 되었다


출구를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에 살짝 아쉬움이 들어서였을까. 잠깐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풍경을 눈에 담는데 저 앞에 익숙한 인영이 열심히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데이빗????”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 친구는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이렇게 불쑥불쑥 마주치는지. 상록숲의 캐터피 같은 존재인가? 얼떨떨한 표정의 나를 보고 그는 활짝 웃으며 다가와 휴대폰 카메라부터 들이밀었다. 우리는 마추픽추에서 퇴장하기 직전, 그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출구 앞에서 찰칵


하산하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중간에 데이빗이 사준 샌드위치를 반씩 나눠 먹으면서 우린 이번 행군도 함께했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까지 내려온 후 밴 픽업 장소인 이드로일렉트리카까지, 전날 왔던 길 그대로 여정이 이어졌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기찻길을 잇따라 걸으며 우리의 0개 국어 대화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따금씩 쌩하니 지나가는 자본주의 기차 페루 레일을 흘겨보기도 하면서. 사실 이 날은 일정 공유가 명확하게 되지 않아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투어 가이드는 온데간데없고 데이빗이 내 가이드가 되어준 꼴이었다. 


저도 자본주의 기차 한 번 타보고 싶습니다...


무사히 도착한 픽업 장소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다 호명된 이름에 밴으로 가보니 안에는 반가운 얼굴이 하나 보였다. 에제키엘이었다. 대체 인원을 무슨 기준으로 나눈 건지는 모르겠지만 데이빗이나 다른 친구들은 죄다 다른 밴에 배정된 모양이었다. 데이빗과 황급히 작별인사를 (또) 나누고 출발한 후에야 우린 서로 번호 교환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스코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두컴컴한 밤. 하필이면 운 나쁘게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내 비옷이 데이빗의 가방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비가 멈추었을 때 벗은 비옷을 그가 대신 챙겨줬는데 돌려받는 걸 깜박했던 모양이었다. 에제키엘은 밴에서 폴짝 뛰어내려 우산을 펼치더니 나를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비옷이나 우산 없어?” 


“응, 없어.” 


“아 이런… 조심해서 가!” 


그는 같이 쓰자는 제안조차 없이 매정하게 뛰어가 버렸다. 바란 적도 없지만 괜스레 그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나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추픽추 투어에 가기 전, 여행사에 큰 배낭을 맡겨뒀기 때문에 그것부터 다시 찾으러 가야 했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서 겨우 여행사 앞에 도착한 나는, 철문까지 내린 채 잠겨있는 건물을 보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여행사 안 구석에 맡겨 두고 온 배낭. 이걸 이제 어떻게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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