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 해석이 무조건 옳다가 아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독서를 한 사람도 있구나.'의 관점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좋아한다. 표현이 모호하고 읽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지만, 그의 문체나 스토리의 진행은 어렵더라도 계속해서 읽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준다.
참으로 오랜만의 하루키였다. 책은 작년에 발매가 되자마자 구매했었지만, 이북 리더기를 구매하고 전자책으로 읽게 되었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해야 될 일들이 많았고,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나름 하루키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읽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자 하는 부분도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너무 확실하게 말해주기 때문에 내가 이해한 것이 정말로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17살의 나와 16살의 그녀는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에서 알게 되어 마음을 나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나에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이야기를 해준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그런데 하나 기억해 줘. 만약 내가 그 도시에서 너를 만난다 해도, 그곳에 있는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그녀에게 그 도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도시의 많은 부분을 그녀와 함께 만들어나간다.
그러던 중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가 말한 그 도시로 옮겨지게 된다.
도시는 무엇일까, 그 벽은 또 무엇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그 흥미로움과 더불어서 도시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계속된다. 하지만 하루키는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도시가 무엇인지, 벽은 무엇인지 알듯 모를 듯, 핸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가는 길을 남기기 위해 빵조각을 뿌리듯 작은 단서들을 남겨놓는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도시와 벽은 내면의 도피처라고 생각을 했다. 무언가에 대한 상실에서 오는 도피처. 우리가 숨어들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그런 곳 말이다.
도시의 시계에는 문자반은 있지만 시침과 분침, 초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영원하다. 한 곳에 머물러있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시간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하루는 계속하여 흘러가지만 시간은 영원하다. 벽 또한 문지기가 가로막고 있고, 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만 한다. 여기서 나는 그림자를 내놓게 된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이 벽은 무척 단단하고, 스스로 계속하여 모양을 바꾼다.
가령 일부의 사람들은 어떠한 사유로 인해 마음속에 진짜의 나(본체)를 가두고 빈 껍데기(그림자)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도시에 갇힌 '나'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17살의 순수하고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녀를 상실한 '나'는 그녀를 찾아 도시로 들어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나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그림자를 내놓고.
하지만 하루키는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라고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어째서인지 안심이 된다 느꼈다. 내가 도시에 갇혀있는 동안 현실에서 살아가는 나 또한 나라는 본체와 역할을 바꾼 것일 뿐 나 그 자신이라는 이야기 같아서.
'나'는 그림자의 설득을 통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결심을 하고 그림자만 현실세계로 보낸다. 본체는 그 상실의 잔향 속에서 '나'를 더욱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도서관의 그녀와 함께 꿈 읽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밖으로 나간 그림자는 '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어째서인지 멀리 떨어지고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 와중에 고마쓰 씨를 만나게 되고,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는 서번트 증후군의 소년도 알게 된다.
고마쓰 씨는 이미 한참 전에 명을 달리 한 등장인물로, '나'와 도서관 사서 소에다 씨에게만 보인다. 그는 '나'와 대화하며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의 소년은 많은 대화를 하진 않지만 어째서인지 도시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결국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도시에 도착하게 된다. 가족들은 모두 그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소년은 순식간에 현실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도시로 들어와 꿈을 읽는 자가 되고 싶어 한다.
소년은 도시로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어 꿈을 읽는 자가 된다. 그리고 '나'는 소년이 미리 이야기 한대로 그 도시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빠져나가기 전까지 '나'는 그림자가 현실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을지, 정말 괜찮을지 걱정하지만,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현실세계의 '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도시 속의 '나'를 안심시킨다.
"당신 분신의 존재를 믿으세요."
"그가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믿으세요. 당신의 분신을 믿는 건 곧 당신 자신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 도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도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들어갈 수 있는 철저한 보안이 걸린 도시에서 다시 빠져나오는 것은, 일차원적이지만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어떠한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을 때, 그럼에도 나는 내가 잘할 것이라 믿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영원히 '나'의 도시에서, 시간도 없고, 동물은 일각수만 있는 무채색의 그 세계에서 살 수는 없다.
일차원적인 해석이라는 생각도 분명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나의 해석은 이렇게 끝을 맺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