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종말' 독후감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자면 유년 시절 난 세상에서 책 읽는 게 제일 싫었다. 초등학교 방학 숙제 중 최악은 단연 독후감 쓰기였다. 물론 책은 다 읽지도 않고 본문에 나온 인상적인 몇 구절 그대로 옮겨 쓴 뒤 '참 재미있었다'와 같은 유치한 코멘트로 끝맺는 게 내 독후감의 전부였다. 독후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서점 혹은 도서관에 가서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은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이후였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맞이한 1993년은 군사정권이 끝나고 처음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선 해였다. 나는 처음으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매주 지하철 가판대에서 '한겨레 21'을 사서 읽으며 세상에 대한 눈을 조금씩 뜨기 시작했다.
영화감독의 꿈을 가졌던 나는 구립 도서관도 고등학교때 처음 가보았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철학, 심리학 등의 인문학적 소양을 미리 갖춰놓아야 한다며 겉멋을 한껏 부리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세상이 이렇게 재미난 요지경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의 자발적인 책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애들 키우기 바쁘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일 년에 책 한두 권도 읽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긴 요즘 다시 책을 잡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읽었던 책들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요즘 읽는 책은 나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쭉 더듬어보니 한쪽 성향으로만 편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십을 바라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와 말들을 따라 한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한다. '양성평등'이라는 말대신 '성평등', '유니섹스'대신 '젠더리스'라는 말을 쓰는 것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 정도는 배웠다.
요즘 읽은 책중에 괜찮았던 책 뭐 없냐고 내가 가끔 물어보는 후배가 한 명 있다. Y다. 나와는 성격도 취향도 전혀 다른 Y를 나의 북큐레이터 삼는 이유는 내가 그 나이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망설임 없이 실천하며 살고 있는 Y의 삶의 방식과 태도가 꽤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Y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30대들의 삶을 간접체험한다. 무엇보다도 평소의 내 취향대로라면 살면서 절대 읽어보지 않았을 책들을 접하는 경험도 신선했다.
얼마 전 Y가 추천해 준 '평균의 종말'(저자:토드 로즈 / 번역:정미나 /21세기 북스)은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평균이라는 허상을 산산조각 내주었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희망보다는 답답함을 느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느꼈던 그런 답답함 말이다. 세상은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을 목도했을 때 느끼는 일종의 허무함 같은 거였다.
평균값에 맹점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평균의 존재에 대해서 한 번도 의심을 갖거나 부정했던 적은 없었다. '평균치라는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조직을 설계하고 수행하면서 우리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허상적 이상에 비교하도록 내몰고 있다고'는 구절로 책은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평균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다. 첫째는 비인가 대안학교 2년 차(표준화와 등급화된 시스템 속의 언어로 표현하면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둘째는 그 이름도 유명한 중2다.
사교육 없이 공교육만으로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고, 사는데 전혀 지장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이상주의자인 내가 첫째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데는 사정이 있었다. 학교 폭력 문제로 중학교 3학년 시절을 힘들게 보낸 녀석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부모로서의 걱정.
무엇보다 녀석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아이의 문제를 바라보는 교사의 태도와 대응 방식이 나의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내가 학교에 다니던 3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아 있었다. 민주화의 역사만큼 학교 교육도 나아졌을 것이라는 나의 희망은 무참히 산산조각이 났다. 하루빨리 공교육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안학교에 진학한 첫째는 무척 만족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내년 초면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온다. 그러나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하나의 대안일 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교육 과정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라고 했을 때 고등학교 과정을 대안학교에서 보내고 난 이후는 결국 다시 제도권 안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첫째가 다니고 있는 대안학교는 수능 공부를 시키지 않고 교육의 목표를 대학 진학에 두고 있지 않기에 녀석이 남들과는 조금 다른 10대 후반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안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나름의 적성을 찾고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대학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대안학교 특별전형 제도가 자리 잡으면 모를까 현재로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수능 정시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대안학교에서 보낸 시간은 전체 교육 과정을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다. 대학 진학을 위한 수능 공부를 위해 몇 년이 시간이 더 소요될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3년의 공백이 단순히 재수로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취업은 어떨까? 요즘 세상에 대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대학 안 나와도 성공할 수 있다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이야기하지만 이미 대학이라는 곳이 취업 사관학교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검정고시로 취득한 고등학교 과정 이수 증명서 하나 가지고 취업에 성공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대안학교의 붐을 일으킨 대학시절 운동 좀 했다는 주변의 86세대를보면 대부분 자녀들의 대학진학을 디폴트 값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86세대가 이 사회를 망친 주범으로 몰린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는 대안학교의 인기도 많이 떨어졌다. 지금 시대의 부모들은 특성화고를 보내고 싶어 하지 더 이상 대안학교를 원하지 않는다. 모든 교육의 목표가 대학에 올인되어 있다.
몇몇 IT 회사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채용 방식은 과거에서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 고졸 출신으로 IT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도 대부분 개발자 직군에 한정된다. 운 좋으면 스타트업에서 기껏해야 인턴 과정 정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대안학교 검정고시 출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전부다.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인턴십이라는 것이 취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들 모두가 예비 '다음 소희'인 상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졸업 후의 진로로 창업을 적극 권장한다. 각종 창업경진대회로 학생들을 내몬다. 청년 창업을 장려하는 많은 상금과 지원금들이 있다. 상 받았다고 좋아할게 하나 없다. 그걸로 끝이다. 이후의 팔로업은 전무하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13년 차 구멍가게를 아직도 이 신에서는 스타트업으로 분류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언제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첫째 아이는 학교 졸업 후에 창업을 하고 싶다고 나에게 의사를 밝혔다. 아직 특별히 하고 싶은 공부를 정하지 못했고 취업을 통해 경험을 쌓는 것도 쉽지 않기에 창업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생기면 대학은 그때 진학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고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반대할 명분도 대안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름 옳다고 믿는 길을 갔지만 그 이후에 마주하는 길이 여전히 부조리한 미로라면 과연 그 길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둘째 녀석은 내년이면 중3. 녀석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고등교육과정의 대안학교를 가지 않는다면 녀석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수능이 전부이고 그 지옥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렇다고 대안학교를 택할 확신도 없다. 아직 첫째의 선택지도 현재 진행형인 상황 속에 그것이 최선이라 확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책의 저자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임을 보아 짐작할 수 있겠지만 '평균의 종말'은 결국 교육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추천해 준 Y에겐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자녀가 한 명 있다. 짐작컨대 부모로서 많은 고민이 되는 시기를 겪고 있는 중일 것이다. Y가 왜 이 책을 읽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표준화된 공교육의 시스템 안으로 발을 들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Y에게 힘내라고, 소신대로 밀고 나가라는 응원 같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글이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도 부모는 이번생이 처음이라 허우적대고 있는 중인데 주제넘은 일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그냥 대한민국에서 사교육 한번 시키지 않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40대 아저씨의 성장통 같은 넋두리 정도로 해두자.
P.S : 책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1,2 장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최대한 원문 그대로 실었다.
'평균주의'의 시작은 천체의 회전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채택된 천문학적 연구법인 평균법을 사람들에게 적용해 본 아돌프 케틀레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간과 시대에서 평균적 인간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라고 단언했다. 케틀레는 평균적 인간을 우러러 받든 반면 평균에서 벗어난 불운한 개인들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가졌다.
현대에 와서 평균인 사람을 완벽한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집단의 전형적 표본으로 간주한다. 케틀레는 중산층이야말로 한 국가의 평균적 국민에 가장 근접한 계층이자 가장 참된 유형으로 보고 정치적 관심을 중산층에 집중시키는데도 일조했다. 평균이 정상이 되고 개개인이 오류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다음 등장한 인물이 프랜시스 골턴경이다. 추후에 케틀레의 바난자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그는 케틀레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신봉했다. 골턴은 평균을 최대한 향상하려 힘쓰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고 믿었다. 인간을 최하위 계층인 저능층에서부터 중간 계층인 평범층을 거쳐 최상위층인 우월층까지 14가지 계층으로 분류하며 평균을 정상의 개념에서 평범함의 개념으로 탈바꿈시켰다.
1900년대 초반에 이르자 인간은 능력별로 하위에서부터 상위까지 분류된다는 관념이 사실상 사회과학계와 행동과학계 전체에 침투하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평균을 뛰어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하거나 평균 이하로 평가받아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케틀레 이후 150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19세기의 많은 시인들과 의사들이 우려했던 그대로 모두 평균주의자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기업과 학교의 주류 원칙으로 올라서게 된 것일까? 이는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라는 한 명의 인물에 의해 주도된 결과였다.
1890년대에 이른 당시. 테일러는 새로운 경제 격변 시대를 주시하며 공장 시대의 문제는 노동학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나섰다. 테일러는 평균주의의 중심 지침, 즉 개개인성의 등한시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업계의 비효율성을 체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과거에는 인간이 최우선이었다면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테일러는 비효율성을 최소화해 줄 새로운 산업 조직의 비전을 표준화로 정의했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근로자를 최악 중의 최악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기업을 관리하는 기준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새로운 기획자 계층. 최근의 용어로 바꾸면 관리자가 탄생한 것이다. 기업에서는 사고와 기획 업무가 현장 업무와 별개로서 분명하게 분리되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모든 산업 국가에서 가장 지배적인 기업 조직의 원칙으로 남아있다.
평균적 근로자들로 이뤄진 시스템이 천재들로 이뤄진 시스템보다 효율적이라는 테일러식 원칙에 따르면서, 학교는 학생들의 특출한 재능을 길러주는데 노력할 것이 아니라, 평균적 학생을 위한 표준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주의자들은 아이들을 산업체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근로자로 성장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전체 교육 시스템의 구조를 평균 중심으로 표준화하기에 나섰다.
교육적 테일러주의자들의 평균주의 채택이 아직 미흡한 수준이라고 여겼던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에드워드 손다이크였다. 그는 테일러의 표준화 개념을 학교의 우등생과 열등생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테일러주의자들의 교육 목표관에 대해서는 이견을 가졌다. 모든 학생이 동일한 평균적 업무에 준비되도록 동일한 평균적 교육을 받게 해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주장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믿었다.
모름지기 학교란 어린 학생들을 각자의 재능에 따라 구분해 저마다에게 맞는 사람의 지위를 효율적으로 정해 그에 따라 교육 자원을 제대로 배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손다이크의 교육관이었다. "평등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우등생을 가려내 이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붓는 것이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손다이크가 교육 시스템의 모든 측면이 평균을 중심으로 표준화돼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 근본적인 이유는 학생 각자의 평균 편차를 측정하기가 더 쉬워지고 그에 따라 누가 우등생이고 누가 열등생인지를 가리기 더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손다이크에게는 학교의 목표가 모든 학생을 똑같은 수준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타고난 재능 수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손다이크의 등급 중심적 교육은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꼼짝없이 가둬놓고 있는 벽이 되었다.
현재의 21세기 교육 시스템은 손다이크가 의도했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평균적 학생에 맞춰 설계된 표준화 교육 커리큘럼상의 수행력에 따라 분류돼 평균을 넘어서는 학생들에게는 상과 기회가 베풀어지고 뒤처지는 학생들에게는 제약과 멸시가 가해진다.
1890~1940년대 약 50년간 거의 모든 사회 시스템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평균과 관련지어 평가하는 추세로 바뀌었다. 시스템이 개개인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을 지침 원칙으로 차츰차츰 받아들이며 우리들 각자에게 유형이나 등급에 따라 기회를 부여했다.
사회가 평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기업들은 번창을 누렸고 소비자들은 보다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게 됐다. 사회의 자원 배분을 우등생에게 집중시키고 열등생에게는 배제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손다이크의 엘리트주의 신념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그는 부와 상속된 특권이 학생의 기회를 결정짓는 요소가 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도 지니고 있었다.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우리는 개개인성의 존업성을 상실했다. 우리의 독자성은 성공에 이르는 길에 놓인 짐이거나 장애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한눈팔기쯤으로 전락해 버렸다. 기업, 학교, 정치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개개인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현실은 누가 봐도 모든 것이 당신보다 시스템이 중요하게 설정돼 있는 상황이다. 회사의 사원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취급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일한다.
개개인이 오로지 평균을 참고해야만 평가될 수 있다는 신념에 입각해 있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야 개개인성을 이해하고 활용할만한 조건을 구축할 수 있을까?
1,2 장의 내용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3장부터는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