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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씨아저씨 Jan 18. 2024

밥값은 야근 수당이 아니다

2024. 1.18

가끔 손님 중에는 일을 마치고 밥이나 차를 한잔 사주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었다. 몇몇 마음씨 좋아 보이는 교포 마나님 스타일의 할머니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허들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끝난 후 근처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밥 한 끼, 커피 한잔을 사주곤 했다. 내 딸 같아서, 내 손녀 같아서, 고생하는 게 맘 아프거나 너무 예뻐서 같은 것이 그들이 말하는 이유였지만, 언제나 본론은 어쨌든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일의 연장선인 셈이고 밥이나 찻값도 사실은 그에 대한 임금 같은 것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냐, 맛있는 거 얻어먹고 얘기 좀 들어주면 어떠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나도 처음엔 그런 생각으로 그런 자리에 참석했지만, 집에 올 때쯤이면 야근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중노동이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자랑'이라는 단어로 바꿔 써도 무방할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과 확장된 본인들, 자식들과 남편 등이 얼마나 잘났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문학동네>


코로나 시기를 거친 이후에 모임의 횟수가 몰라보게 줄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얼마나 중노동이었는지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40대 후반인 내가 만나는 그룹은 딱 2종류인 듯하다. 하나는 50-60대 선배들. 그리고 하나는 30대 후배들. 


나이가 들수록 선배들과 함께 하는 모임은 가급적 피한다. 골프이야기, 주식이야기 아니면 자식이야기. 골프와 주식을 하지 않는 나는 정말 고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그나마 깨어있는 세대라 할 수 있는 86세대들. 학교 다닐 때는 돌꽤나 던지셨던 분들이 50대가 되어서 보이는 모습은 실망스러웠을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참 교육을 이야기하며 우리나라의 대안 교육의 부흥을 이끈 세대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모두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을 본인들의 인생 목표로 삼더라.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과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동일시하는 문화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과 만났을 때 유일하게 좋은 점은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서로 자신들 이야기하느라 혈안이 되어있으셔서 감히 나 따위가 발언권을 얻을 기회는 많이 없다. 작가 이반지하가 느낀 중노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책을 보고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30대 후배들을 만나는 모임에서 그 후배들이 갖는 감정이 나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밥값과 커피값을 내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역할을 다 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위 경험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을 텐데...


X세대인 우리 세대의 직장 및 사회에서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상사의 점심 파트너가 되어줘야 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동시에 MZ세대에게는 밥을 같이 먹자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낀세대.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도 나름 힘들겠구나 싶어 안쓰러울 때도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은 우리 늙은이들이 마음속 가장 맨 위에 새겨놓아 할 명언 중에 명언이다. 그리고 앞으로 후배들과 밥을 먹을 때는 밥값과 커피값은 디폴트이고 꼰대들의 라떼이야기를 들어주는 노동에 대한 명확한 수당을 지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무임금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후배님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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