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디자이너 일기 #1.5
저는 스타트업 'Common Computer'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사내에서 CI(Corporate Identity)정립과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제가 밟아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블로깅을 시작했습니다. 이 글이 정식으로 브런치에 연재하는 CI 프로젝트의 첫 번째 글입니다. 계획과 인터뷰, 그리고 그 수확물을 편하게 기록했습니다.
#1편_https://brunch.co.kr/@yjyjyjy95/2
aFan_https://afan.ai/
이번 포스팅은 aFan이란 브랜드에 대해 고민했던 2-3주라는 시간과 그 결과물에 대한 기록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aFan 굿즈 제작기이지만, 이 얘기가 이렇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진중한(?) 태도로 포스팅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한 스케줄이었다면 지난주에 CI의 진행 프로세스가 포스팅으로 올라가야 했으나...급한 일부터 먼저 끝내고 진행하기로 한다. (그래서 이번 글은 #2가 아닌 #1.5이다.) 2주 뒤에 있을 aFan 서포터즈 발대식 준비와 그 밖 다른 급한 디자인 업무가 더해져 스케줄이 빡빡해졌기 때문이다.
모니터 옆에 둔 캘린더에 CI 스케줄을 꽉꽉 채워 써놓아서 볼 때마다 뜨끔한다. 순식간에 2-3주가 지나갔다. 1월에 작성했던 내 OKR 항목 중 'afan의 고객 접점(sns채널, 웹디자인 등등)을 잘 다듬어 빌드업 하기'가 있다. ('잘 다듬어'이라니, 왠지 변명하는 것처럼 써놓았다.말이 쉽지...) 지금까지는 보통 웹이나 앱에서 보여지는 그래픽들을 만들고 정돈해왔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aFan의 고객 접점이었으나, 최근에 aFan 굿즈를 만들어야하는 새로운 이슈가 생겼다. 마케팅 홍보 채널의 역할이 커지고, aFan을 홍보하면서 크리에이터로 활동해줄 서포터즈까지 뽑으니 여러 사람들에게 aFan의 존재감을 알릴만한 예쁜 굿즈들이 필요해졌다.
aFan의 톤과 attitude정도를 러프하게 먼저 생각해봤다. 어차피 답은 없고, 회사분들과 함께 다같이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aFan을 파악하기보다, '앞으로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를 더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역시 귀여운 게 최고지, 귀여운 게 다 이겨!라는 마음으로 디자인했다. 물론 지금 만들어야 하는 것은 판촉용 굿즈일 뿐이지만, 앞으로 서비스가 확장되면서 소비자가 마주칠 접점이 많아질 것이기에 미리 대비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근히 사소한 디테일에서 브랜드의 이미지가 좌지우지되더라. (이렇게 소소한 블로그를 쓰는 것도 그런 '디테일'의 일부랄까...한 두명이라도 이 글을 보고 우리의 서비스를, 그리고 디자이너인 나를 알게 된다면야.)
다시 달력을 보자. 서포터즈 발대식에 맞추어 굿즈가 모두 다 완성되고, 2주 안에 배송까지 완료되어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필요한 굿즈 목록을 뽑고 달력을 보니 시간이 2주 뿐이더라. 상당히 여유로운 줄 알았는데 이럴수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당장업체를 알아보고, 디자인을 시작했다. 목표는 2주 안에 완성될 정도로 심플하게, 하지만 싸보이지 않게 디자인 하기.
먼저 오래걸리는 에코백부터 해치웠다. 흰 에코백에 그래픽 인쇄를 빵 때려넣는 건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 하면 너무 촌스러워서 장바구니로 전락하기 쉬운 유형이다. 그래서 주자라벨을 박아넣는 디테일만 주기로 하고, 최대한 제작에 효율적인 방향으로 업체와 상의하며 방향을 좁혔다. 이번엔 이렇게 마무리하지만, 다음에 굿즈를 만들 일이 생긴다면 정말 고퀄리티 소량제작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고급지게 하리라...
굿즈에는 aFan이라는 서비스 이름을 따 aPen, aBag, aNote 같은 이름을 지었다. 인싸가 되고싶은 아싸스러운 센스지만 나름 귀엽다고 합리화한다...여름이 되면 휴대용 선풍기 굿즈(aFan)을 만들 생각이다ㅋ
스티커는 왠지 더 신경이 쓰였다. 차분한 톤의 나머지 굿즈와는 달리 더 개성있는 포인트가 될 수 있기에 약간의 일러스트로 힘을 주기로 했다. aFan의 '팬과 크리에이터가 함께 성장하는 sns'라는 컨셉에 맞춰 두 역할을 그림으로 풀어보았다. 함께 들어갈 문구는 Fan의 입장에서 창작자를 응원하는 듯한 화이팅 넘치는 문장으로 써보았다. 로고가 손가락 하트이다보니 일러스트도 자연스럽게 손동작으로 풀리더라.
서포터즈에는 기대보다 많은 친구들이 지원해줬다. 게다가 난생 처음 면접관이 되어 그 친구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다. 나도 몇달 전까지는 면접을 보러 다니는 당사자였고, 지금도 포트폴리오를 고치면서 살고 있지만 이렇게나마 면접관이 되어보니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 정말 간단한 면접자리였지만 우리를 만나기위해 ppt를 만들고 할 말을 가다듬었을 시간을 생각하니 굿즈를 정말 잘 만들어서 선물해 주고싶었다. 물론 나도 예쁘게 쓰면 더 좋고 말이다. 보라색이 더 잘나왔으면 좋으련만, 다음엔 감리보러 다닐 시간까지 충분히 계산해야겠다.
난 산업디자인과 출신이라 브랜드를 먼저 만드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학부생 3-4학년 쯔음이 되어서야 '기획하는 디자이너' 열풍이 불면서, 수업 커리큘럼에도 기획에 대한 이슈가 엄청 중요해졌다. 정작 기획에만 힘을 쏟다가 학기 말에 디자인을 대충 해버리는 일이 대부분 이었지만,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처음 가졌던 시기였다.
졸업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봤다. 실무를 경험하면서 갈수록 더 중요해지는 건, '내 디자인을, 내 브랜드를 어떻게 보여주느냐'이다. 기획과 디자인 열심히 해서 멋진 결과가 나왔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굳이 우리를 찾아와서 박수를 쳐주는 게 아니다. 우리를 자꾸 노출시키고, 사람들이 귀기울일 만한 이야기를 계속 던져야 한다. 일회용 디자인들이 차고 넘친다. 이런 것들은 금방 잊히기 쉽지만, 이게 브랜드로 엮여서 쌓이면 훌륭한 자산이 된다. 원래 단발적인 디자인 작업을 오래 해왔기에, 디자인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쉽게 쌓였다. 난 그저 예쁘게 포장하는 사람이 아닌데, 세상의 디자인이 왠지 다 속이 텅 빈 겉치장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렇게 고민이 많았을 당시 졸업을 미루고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수업을 들었었다. 학과에서 제일 빡센 수업이라 수강생의 2/3가 포기한다는 악명이 자자했던 수업이었다. 교수님의 스파르타 학습법으로 고생은 있는대로 다 했지만 그때의 경험 덕에 많은 용기를 얻었다. 내게 부족했던 디자인 뒷심과 맹비난이 쏟아져도 일어나는 맷집(?)이 길러졌다. 가장 즐거웠던 건 각각의 작업들이 브랜드라는 하나의 줄기로 엮이는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내 디자인이, 내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게 좋다. 다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조만간 교수님께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