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루라도 더 같이 행복하기로 해요. 가능하면 오래 말이에요.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주입식 교육을 제대로 받은 세대. 달달 외운 지식들이 사라져 갈 만도 하지만 가끔씩 떠오르는 시조 한 구절씩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철의 시조이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섬기는 일을 잘하여라. 돌아가신 후에 슬퍼한들 무엇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이 부모 섬기는 일뿐인가 생각하노라." "효"를 강조하던, "수능"용으로 외워댔던 저 시조의 한 구절에,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가족여행이 조급함이 저 끝에 가서 닿아있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은 부모가 되어가고, 아이에 대한 넘치는 사랑은 SNS에 넘쳐간다.
아직 미혼인 내 사랑은, 나의 엄마아빠에 향한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먹어갈수록,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엄마 아빠가 되어 갔다. 그리고 친구들의 메신저 프로필은 아이들의 사진이 하나 둘 채워갔다. 어디 프로 필 뿐인가, SNS의 사진들도 여기 무슨 전국 아가 사진 자랑대회인가 싶게 모조리 아가들의 사진으로 차오르는 걸 보면서 아 이렇게 또 우리의 시간은 흐른다 싶다. 아이의 자는 모습, 아이의 뛰는 모습, 아이의 웃는 모습,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간 모습... 어느덧 내 친구들의 모든 생의 즐거움이 자기 아이로 옮겨져 간 걸 보면서 우리가 이렇게 또 나이를 먹었구나, 어느덧 "부모"들이 되었구나 싶었다. 아이가 없는 친구들의 사랑은 여러 곳으로 표출되었다. 남자 친구의 사진, 키우는 반려견 반려묘의 사진, 친구들의 사진,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 예쁜 가방, 예쁜 신발의 사진, 여행에 푹 빠져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그런 나의 주변인들에게 나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다. 나의 관심은 여행, 그것도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가는 여행에 꽂혀있다.
나는 아직 미혼이다. 결혼을 안 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꼭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결단코 혼자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는 쪽도 아니라 그저 인연이 있으면 삶은 또 그렇게 흘러가겠지 하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아직 애가 없고, 애가 없다 보니 친구들의 그 부모 된 마음을 아직 크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나의 마음은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나의 아이 대신 나의 부모님께로 향한다. 효녀 심청이가 울고 갈 만큼 타고난 효녀도 아니고,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효심, 충절, 뭐 이런 것을 목숨처럼 여기는 조선 명문가의 몇 대손 이런 것도 아니다. 엄마한테 바락바락 대들기도 하고 심술부릴 땐 '저놈의 지지배가 저 같은 딸을 낳아봐야 안다'는 엄마들의 그 흔한 잔소리도 여러 번 듣는 그저 평범한 요즘의 딸인데, 유독 여행을 할 때만 되면 없던 효심도 생기고 만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시작한 건 내손으로 월급이란 걸 받은 후부터이다. (아직 여행 다녀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로 떨치지 못하고 다니는) 첫 직장에 들어온 지 10년째. 나는 틈나는 대로 엄마 아빠와 함께 여행을 한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국내든 해외든 상황이 되면 되는대로 함께 하려 한다. 시간이 없을땐 집 뒷산이라도 함께 오른다. 그리고 그런 여행의 끝에는 뿌듯함이 있고, 시간이 지난 후 그 뿌듯함은 가는 세월이 야속해서 조금은 슬프기도 하고, 우리가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많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대견하기도 한 추억으로 남는다.
이런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엔 잘 몰랐다. 그땐 그저 신나고 좋아서 설렌 마음에 겨워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렇게 두어 번이 지났고, 대학교 3학년 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1년간 어학연수 비슷한걸 무사히 마치고 나서 두 달간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했을 때, 가는 곳곳마다 괜히 엄마 아빠 생각이 났던 게 내가 만드는 가족여행의 시초였던 듯하다. 세상은 넓었고 신기했고 아름다웠고 벅찼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아 이건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 여긴 아빠가 좋아하겠다"라는 생각을 계속하곤 했다. 그 후 몇 번을 더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 여행을 할 때마다 "아 여긴 같이 올걸, 아 여긴 같이 왔어야 하는데"하는 마음들이 계속되고 마음 한 구석이 계속 편치 않았기에 그다음부터는 아예 "같이"떠나기로 작정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엄마아빠의 젊음을 먹고 가난의 시간을 건넜다.
우리에겐 풍요로운 젊은시간이 남았고, 엄마아빠에겐 우리가 남았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나만 지내온 것도 아니지만, 유달리 나는 그 시절의 엄마 아빠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갚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혼자 좋은 곳에 가거나 좋은 것을 보다 보면 미안함도 있고, 고마움도 있고, 알 수 없는 부채감도 생기며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단칸방에 살았고, 그러다 방 한 칸을 넓혀 여전히 셋방살이를 했고(돌아가신 호랑이 집주인 할머니를 우리는 많이 그리워한다), 차가 없어 자전거에 우리를 태우고 다녔고(아 나는 이 추억을 사랑한다. 특히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낚시를 가던 시간.언니는 뒷자리, 나는 보조의자 앞자리), 학원비를 아끼려 집에서 공부를 가르쳤고, 사촌들의 옷을 물려 입었던(사진 보면 영 똑같이 촌스러운데, 왜 그렇게 서울 고모네 사촌들의 옷은 멋져 보였을까) 그 힘든 시절을 우리는 모두 같이 지나왔는데, 엄마 아빠와 나에게 남은 것이 다르다.
공통적으로 따지자면야, 우리 가족은 이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때에 먹을 만큼(물론 어느 범위 한하겠지만) 옛날보다는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롭다. 자식들인 나나 나의 형제들은 대학까지 나왔으니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배우고 싶은 만큼 부족하지 않게 배운 셈이고(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만 배우고 싶다.회사에서 자꾸 뭘 더 배우라고 할 때마다 좌절한다.), 나름의 직장을 가졌으니 제 밥벌이는 알아서 문제없이 할 테고, 학생도 아니고 성인이 되었으니 자신들의 즐거움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결정과 책임을 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같이 그 시간을 지내 온 엄마 아빠가 우리에게 쏟은 건 두 분의 에너지가 한창때의 "젋음의 시간"이었던 지라, 어쩌면 지금 우리 엄마 아빠에게 남은 건 자식뿐인가 싶다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사회생활을 꾸준히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지만 우리에게 쏟은 그 "젊음"을 지금의 그 무엇과 바꾸겠나 생각하면 잘 자란 자식들 뿐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다 그만할 때 시집가 그만할 때 애 낳고 살았다지만, 엄마가 우리 삼 남매를 모두 낳았던 나이가 현재의 나보다 어리다는 걸 헤아리고 나면, 맙소사 그렇게 어린데 애를 셋이나 낳아서 키웠단 말이야? 하는 생각에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울컥 올라오게 되는 것이었다. 그 나이의 나는 세상이 신기했고, 온통 즐거웠고, 가고 싶은 곳이 넘쳤고 늘 벅찼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그 나이에 우리를 데리고 그 긴 가난의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세상으로 키워 낸 것이 엄마아빠였다면, 이젠 내가 찾은 그 넓은 세상을 엄마아빠와 공유하고 싶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늘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으로 고르는 것이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같이 가면 좋아"라는 이유 하나로 늘 함께하다 보니, 어느 날엔가 "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나"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들을 찾으려고 애썼을 뿐. 사실 매우 단순하게 같이 가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덜 즐거운데, 같이 가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더 기쁘고 뿌듯하기 때문이다. 함께하면 좋으니까 자꾸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세상을 열고 마주할 수 있게 온 힘으로 나를 키운 게 엄마 아빠였다면, 이제 엄마 아빠에게 내가 만난 더 넓고 멋진 세상을 공유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재밌는 건 엄마도 재밌고, 내 입에 맛있는 건 아빠도 맛있고, 내 눈에 멋있고 감탄이 나오는 건 엄마 아빠에겐 두세 배의 감탄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걸 모든 여행에서 항상 깨닫는다. 평소에 하지 못했던 더 많이 얘기를 나누고, 내가 모르던 엄마 아빠의 모습을 더 많이 보는 것이 우리의 여행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내가 준비했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스럽고 뿌듯하고 막 칭찬해주고 싶고 그렇게 행복해지는 것이다. "아우~ 우리 딸이~"이러면서 엄마 주변인들에게 어깨에 한껏 힘주고 자랑이라도 하고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그 뿌듯함은 무한대로 증폭되면서 더 큰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의욕이 펑펑 솟아난다.
얼마 전 엄마 아빠랑 아주 오랜만에 여행을 다녀온 언니가 "야, 엄마 아빠 많이 늙었더라."라고 한다. "응. 나는 늘 여행하면서 내가 사진 찍고 정리하면서 꺼내보고 하면서 아는데 언니는 잘 못 느꼈지? 그니까 잘해드려."라고 괜히 어른스레 말을 했는데, 괜히 또 울컥 눈가가 뜨거웠다. 글을 쓰다가 몇 년 전의 여행 사진을 꺼내 보다 보면 "아... 엄마 아빠가 이때 고작 몇 년 전인데 이렇게 젊었네" 하고 깨닫는 날에는 "아.. 시간이 멈춰버리면
안될까"싶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게 안되는 걸 아니까 우리는 더 열심히 시간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다음 우리의 여행지를 바삐 고르게 된다.
돈은 나중에 벌수 있지만, 나중에 우리의 "지금 이 시간"을 벌수는 없으니까.
돈을 열심히 모을 나이에 그렇게 여행비로 펑펑 써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분들도 계셨지만(특히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있다? 허 참...) 나의 씀씀이는 보통 알뜰하고, 여행도 최대한의 발품과 그간의 노하우를 발휘하여 알뜰살뜰 다니는 편이니 괜찮다.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큼의 가성비를 이룩하는 스킬!) 돈을 전혀 모으지 않는 것도 아닐뿐더러, 지금 돈을 먼저 모으고 "나중에" 엄마 아빠랑 여행 가야지 하는 것보다, 지금 열심히 여행 다니고 나중에 좀 더 오래 벌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
나의 주변 분들, 특히 회사의 남자 상사분들은 나의 이런 여행을 "매우"지지하신다. 그리고 부모님의 연로하시거나, 이미 돌아가신 나의 주변분들은 나의 이런 여행을 "엄청나게" 지지하시며 "지금 당장, 더 멀리, 더 많이"가라고 응원하신다. 내 가정이 생기고 내 식구가 늘다 보니 마음은 늘 있었는데 그렇게 부모님하고 여행하기가 쉽지 않더란다. 또 양가 부모님을 모두 챙겨야 하다 보니 부담이 늘어 어느 쪽 한쪽 선뜻 모시고 나가는 것이 쉽지 않기도 했단다. 그렇게 이핑계 저핑계 대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나중으로 미루었던 시간들이 나중엔 없더라며... 너무 연로하셔서 어디 한번 가기 쉽지 않아져 버렸고, 혹은 이제 다 준비되었다 싶은데 이미 부모님은 하늘나라로 가 버리셨단다. 그러니 지금 당장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몇 푼 돈 모을 생각 말고 한껏 열심히 다니라고 '장하다 장하다, 내가 너처럼 했어야 하는데 못했다' 후회를 담아 응원해 주시는 것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어쩜 이렇게 엄마 아빠를 찾아대는지, 내가 혹시 애정결핍이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자꾸 마음이 조급하다.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언젠가 다가올 엄마 아빠와 헤어질 생각을 하면 벌써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여행 사진들을 꺼내보다 보면 해마다 조금씩, 혹은 갑자기 훅 늙어버린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은 슬프기도 하고 어느 순간은 자꾸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나중에 우리가 헤어지는 시간이 오고, 엄마 아빠가 몹시 그리울 때마다 나는 우리가 함께 갔던 곳을 다시 여행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혼자 가면 슬플까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렇게 찾아갈 추억이 있으니 조금 덜 슬플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선 우리 서로 살아있을 때 한껏 즐겨보자고 엄마 아빠에게 여행을 청하련다. 우리의 여행으로 나중에 내가 엄마 아빠와 안녕하고 나더라도 또 다음 세상으로 발 디딜 에너지를 모으는 중이라고 말이다.
내 자식은 자라겠지만, 내 부모는 늙어가시는걸 내 친구들도 알면 좋겠다. 물론 알겠지만 지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에 가려, 혹은 내 부모님은 늘 그자리에 계시겠거니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꾸 미루고 있을지도 모를까 봐 말이다. '니가 아직 애를 안낳아봐서 그래'라고 말한다면 '니가 아직 부모님이랑 그렇게 여행을 안가봐서 그래'라고 받아야할까? 이렇게 매번 여행을 가고 시간을 나누는 내 마음도 이렇게 조급한데, 나중에 문득 깨닫고 나서 너무 후회할까 봐... 어버이 사라신제 함께하라고. 더 많이 같이 행복하라고 그냥 써 내리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신호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