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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보배 Oct 11. 2021

그냥 버티는 건 해결책이 아니야.

도망을 치든가, 도망칠 준비라도 하든가.

그 이상한 옆팀 팀장님에 대한 우리의 대화가 계속된다. 



-    으이그. 그럼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봐. 너는 입사하고 진짜 뭐 저런 x새끼가 다 있나 싶은 그런 사람 안 만나 봤냐고. 

-    아, 네, 저는 그렇게까지 지랄 같은 사람은 안 만나봤어요. 

-    에라이 복 받은 놈아. 난, 다 만나봤어. 아주 종류별로 이상한 사람을 골고루 섞어서. 이게 “라떼는 말이야” 하고 과거형으로 끝나면 그냥 나는 꼰대인 거고, 이런 거지 같은 일들은 너네는 더 이상 안 겪을 테니 참 좋겠지? 그런데 나는 겪었고, 너는 안 겪었는데, 갸는 겪고 있지?

-    네….

-    그러니까 이게, 운이야. 운. 내가 뭐 결정하고 말고 할게 아니라 그냥 팔자라고. 근데 그 척박한 운을 버틸지 말지, 이건 또 누가 결정해? 이건 억울해도 본인이 정해야 해. 사람마다 성격도 상황도 성향도 다르니까.


그렇다. 인복도 복이라고 조직에서 어떤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건 내 힘으로 어찌할 바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괜찮다는 인물이 나한테는 최악일 수 있고, 나한테는 괜찮은 이를 두고 모두들 하나같이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회사에서 최악인 사람을 만나서 힘들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건지 결정하는 건 내 몫이다. 다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니다. 이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신입 아이에게 필요한 건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현장에 있는 동기랑 부둥켜안고 운다고, 그 꼴을 측은히 여겨 이상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좋은 사람이 되어 줄 리 없다. 선배랍시고 연락이 올 때마다 징징거리는 이야기를 들어줘 봐야, 잠시의 마음의 진정과 새로운 다짐의 힘 정도는 되겠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나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그 지랄 같은 인간들이 이직을 한다고 해서 다른 회사에 없으란 법도 없다. 직장 내 돌 I들은 진짜 어른 인체 하며 도처에 숨어있다. 


일도 좋고 회사도 좋은데 괴롭히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면 한 번쯤은 회사를 상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소리 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신입이 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앞으로 어떤 꼬리표가 붙을지도 두려울 거다. 그 말 조차 할 용기가 없으면 참아야 한다. 단, 그냥 참으면 안 된다.  


-    일단 갸한테는 일기 쓰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래. 구체적으로. 만약의 경우가 생겨도 기록이 도와줄 거야. “예전에, 한 번은, 그때,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애매한 거 말고. 정확한 날짜와 내용과 그때의 기분들, 그래서 더 생각했던 것들을 차분하게 매일 써보라고 해. 나중에 다 터뜨려버리겠다 뭐 이런 복수를 위한 데스노트를 쓰라는 게 아냐. 다만 글로 풀어쓰다 보면 속도 좀 풀리고, 상황과 나에 대해 생각도 할 수 있거든. 생각보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더라. 그리고 정말 아주아주아주 최악의 상황엔, 결국 나를 좀 지켜줄 자료가 될 거고. 

-    아, 네 누나! 

-    그리고, 어느 정도는 무시하는 연습도 하라 그래. 그게 뭐 회사 선임이 말하는 게 다 명언이고 직장 생활의 핵심 노하우 같은 줄 알아? 개소리도 많아. 한쪽 귀를 계속 닫고 있으니까 그 개소리들이 나가질 못해서 마음에 맺히는 거야. 한쪽귀로 듣고 반대쪽 귀 열어서 술술 지나가게 하는 연습도 필요해 살다 보면. 단, 자기 할 일은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이 해두라고 하고. 헬스장 가고 싶다고, 8시 넘었다고 자기 일도 다 못 끝냈으면서 쪼로록 나가고 그러면 갸 행동에도 명분이 없어져. 

-    그렇겠네요. 

-    나야 지나고 났으니 이렇게 하는 말이지만 신입사원 주제에 어디 그런 마음이 쉽겠냐. 어지간한 똘끼 없음 다 고만고만하지. 어지간한 똘끼인 나도 신입 땐 눈치 보고 맘 졸이고 살았는데 뭐. 물론 난 참고 참고 참다가 사표 써 들고 나는 때려 칠라니까 한번 같이 죽어보자고 덤빈 적도 있어. 근데 그럼 서로 인생 험난해지니까 그런 건 함부로 안 하는 게 좋고. 

-    누나한테 얘기하고 나니까 저까지 좀 후련해요. 


나의 산전수전 공중전의 회사생활은 이렇게 후배들한테 썰 풀어주라고 쌓였던 것이었던가. 


-    너 근데, 버틴다는 생각의 가장 큰 약점이 뭔지 알아?

-    네? 

-    대책을 안 세우는 거야. 일기를 쓰든 한쪽 귀를 열든, 그렇게 하면서 지금의 시궁창 같은 상황에 계속 있을 건지 말 건지를 정하고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냥 이 순간만 지나가면 되겠지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거라고. 

-    대책을 강구하라는 거죠?

-    그래 이놈아. 그 현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능력치라도 바짝 업그레이드 해 둬야 기회가 왔을 때 냉큼 잡고 튈 거 아냐. 영어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트렌드에 맞게 영상 편집이라도 배우라고. 여기에 더는 못 있겠다 싶어지면 이 짓을 갑자기 때려 쳐도 먹고살 궁리를 해둬야지. 공기업 준비를 밤새 하든, 공무원 준비를 밤새 하든. 거기서 누구 부둥켜안고 울기만 하면 어쩌자는 건데? 뭐가 되냐? 실제로 니 선배 중에 위에 사수가 개소리로 갈굴 때마다 밤에 공부해서 공기업으로 이직한 애도 있어. 

-    아, 정말요?

-    그래. 그니까, 퇴근 못하게 하면 사무실 앉아서 공부나 하라 그래.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니 놈 얼굴 다시는 안 볼란다 하는 마음으로 이 악물고. 해결은 그렇게 하는 거야. 대책 세워가면서. 그리고 혹시나 지금 회사 말고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하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라고 해. 애매하게 3짜 그리면 취직 더 힘드니까. 갸가 지금 헬스장에서 몸 만들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아, 그래도 건강은 잘 챙겨야 하고. 

-    네 누나, 그렇게 얘기할게요. 이 얘긴 저한테도 해당되는 거 같아요. 역시 누나한테 물어보길 잘했네요. 고마워요 누나. 



이제는 회사에서 나의 위치는 선배와 후배가 반반 정도 중간의 위치이다. 빠르게 나가는 많은 선배들과 취업난을 뚫고 겨우 들어오는 적은 후배들의 이동 속도를 비교하면, 나도 곧 꽤 선임의 자리에 서있을 것이다. (그전에 나도 졸업하자 제발) 회사에서 불합리적이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던 상사의 말이 떠오른다. 하나는 “고쳐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바로 고쳐지게 하는 것”, 다른 한 가지는 “내가 고칠 수 있는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 마음을 간직하며 기다리는 것”. 나는 어떤 고참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이다. 후배들의 속상한 이야기에 어설픈 조언을 내고 보니, 오늘도 나의 모든 이야기는 너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 인생 대책도 찰지게 세워봐야겠다.



우울하고 막막한 오늘의 기분에도 다시 해뜨는 날 올거니까 힘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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