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후배 녀석이 선배인 나에게 물어왔다.
- 누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같은 과 후배 녀석한테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더니 시간이 괜찮으면 물어볼 게 있단다.
- 제 후배 한 놈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현장에 갔는데요, 일이 있든 없든 밤 8시까지는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퇴근을 해야 한대요. 일이 있어서 야근할 때는 괜찮은데 6시 땡 하고 일을 끝내도 눈치 때문에 8시까지 있어야 하는가 보더라고요.
설마, 이 정도 고민을 털어놓자고 이렇게 진지한 건 아니겠지. 다들 그러고 있는 곳에서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할 배짱이 없으면 같이 그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 내가 신입사원일 때, 그러니까 대충 13년 전쯤 했던 고민을 하는 신입사원이 지금도 있는 걸 보면 노동 환경의 개선 속도란 느려 터진 게 분명하다. 법으로 주 52시간 같은 걸 외치면 뭐하나, 그 작고 작은 조직들을 쥐고 있는 자들의 허락이 없으면 피부에 와닿지도 않을 것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후배 녀석이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거기 옆팀 팀장님이 ‘일반직’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다,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한다, 뭐 그런 마인드라서 일찍 들어가서 숙소에서 쉬고 있으면 방까지 와서 열정이 없어 보인다고 뭐라고 하신다더라고요.
역시, 회사생활에서 숙소 생활 옵션이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아마 현장 수당이라고 좀 더 붙여 주는 돈은 이런 사생활 침해에 대한 정신적 피해보상비가 아닐까. 어쨌거나 듣고 보니 흥미진진한 인물이 하나 등장하는 것 같다. 경험상 “열정” 같은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와 “일반직, 계약직” 같은 민감하고 계급적인 단어들을 함부로 운운하는 사람들은 많이 이상했으니까. 역시나, 뒤따르는 설명이 심상치 않다.
- 그 친구가 현장에 비슷한 나이 직원이랑 같이 밤 8시~10시 헬스장을 다니는데, 그것도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8시까지 야근 다 하고 나가는데도 ‘야 너는 생각이 있니 없니’ 이렇게 시작하면서 왜 열정이 없냐고 한참 뭐라고 하셨대요. 그리고 걔네 팀에 계약직 중에 그 팀장님 지인이 있는데, 왜 그 친구 일을 같이 더 안 해주냐, 돈 더 많이 받는 일반직이면 일도 더 많이 해야 하는 거 모르냐 뭐 이렇게 자꾸 뭐라고 하신대요. 이번엔 걔네 팀이 회식을 하고 왔는데, 사무실 앞에서 그 옆 팀 팀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분들 들어가시고 나서 그 친구만 불러서 또 한참을 혼냈대요.
- 뭐라고 했대?
- 너 요새 열정이 왜 이렇게 없냐, 자꾸 그러면 내가 회사에서 매장시킬 수도 있다 뭐 그런 협박 같은 말도 하셨나 보더라고요. 이 친구도 자기 나름은 일도 열심히 하고 계속 부당하게 혼나도 잘 참고 버텼는데, 이번에 그런 이야기 듣고 멘탈이 정말 나간 거 같아요. 저한테 전화 와서 이게 맞는 거냐고, 자기 너무 힘든데 원래 다 그런 거냐고 물어보는데 제가 뭐 더 할 말이 없더라고요. 예전에도 통화할 때마다 힘들다고 했었는데 참고 버티라고 했었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현타가 심하게 온 거 같아서요. 제가 함부로 조언하기 부족해서 누나한테 좀 여쭤보고 싶었어요.
- 아니 근데, 걔네 팀장은 옆팀 팀장이 제 새끼를 갈구는 걸 그대로 두고 본대?
- 아, 걔네 팀장님도 전문 계약직이시라서 그 옆 팀장님한테 크게 뭐라고 못하시나 보더라고요.
참, 진짜 열정 같은 소리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지인 취업, 사내 협박, 계약형태별 힘자랑까지 골고루 섞여있다. 진짜 더럽고 치사하다. 이 정도면 훈계를 넘어 직장 내 괴롭힘 아닌가. 세상엔 참 꾸준하게 이상한 사람이 많다. 그리고 이제 막 이 사회에 진입한 꼬꼬마 어른이들은 여전히 그 이상한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충격받고 좌절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디어에서 MZ세대가, 90년대생이 특별하다고 쏟아내던 그 기사들도 결국 일부였던 건가. 호기롭게 왔다는 90년 대생들도 직장이라는 세상에 진즉에 와서 죽치고 앉아 있는 정신상태 이상한 가짜 어른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게 분명하다.
- 그 옆팀 막내도 일반직인데, 맨날 얘랑 서로 부둥켜안고 많이 울다가 결국 사표 냈다더라고요. 그래서 얜 더 심란해하는 거 같아요.
- 흠… 걔 몇 살이니?
- 28살이여.
- 그래서, 그 28살 신입 후배는 하고 싶은 게 뭐래? 복수래? 사표래?
- 아뇨, 복수라뇨. 그런 건 꿈도 안 꾸죠. 그냥 자기 팀에서 옆 팀 팀장님 괴롭힘 안 당하면서 일 잘 배우고 싶대요. 일 하는 건 재밌대요.
참 딱하다. 이 어린 영혼에게 나는 무슨 도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 야, 너는 입사하고 나서 이상하고 지랄 같은 사람 안 만나봤어?
- 아, 역시, 회사에 계속 다닐 거면 버티라고 해야겠죠?
아이고. 이쯤 되면 선배라고 이 녀석에게 전화해서 고충을 토로하는 그 신입 녀석도 참 딱하고 짠하다.
- 아이고, 그냥 니 후배한테 얘기하렴. ‘안 버티면 어쩔 거니. 그냥 버텨야지. 혹시라도 사표를 낼 거면 후다닥 내라, 한 살이라도 어릴 때’라고.
- 네?
- 왜, 너무 돌직구야? 아니면 뭐,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야?
- 아뇨, 아니, 저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데, 이 친구가 여기 회사 입사하고 나서 부모님이 울면서 좋아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저도 그냥 버틸 수 있으면 버티라고 하긴 했는데, 그게 이 친구를 위해서 맞는 답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들어주는 녀석이나 털어놓는 녀석이나 참 한결같이 비슷하다.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부모님이 저의 입사를 너무 좋아하셔서” 내가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버티겠다는 애들이 많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비겁한 효자효녀가 과거의 나 말고도 많다는 거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유다. 그러게 치면, 다른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좋아하실 텐데 왜 그렇게는 하지 않는 거지? 자기 자식이 고통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무조건 버티길 바라는 부모님들은 세상에 없다. 심지어 그 이유로 부모님들을 꼽는다면 보나 마나 당장 관두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내 새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그 미친놈 이름 대라고 회사에 쫓아오실지도 모른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이 아이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