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민 Jul 21. 2024

8개월 공시생활의 기록

인생에서 최고로 열심히였던 기간

내 인생엔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공무원 시험이라는 것에 도전하게 되었다. 나도 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지금까지 뭐 하나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라는 인간이 해볼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공기관 파트타이머에서 공시생으로.

회사를 바로 퇴사하지 못하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봐주던 시기에 남는 시간이 아까워 다른 일거리를 찾았다. 단순히 남는 시간에 알바나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건데 그것의 나의 1년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대학생 때 시청알바를 한 이후 처음으로 공기업에서 일을 해보는 거였다. 새로웠다. 일단 같은 시급이라도 이것저것 붙는 수당이 많았고 일하는 사람들의 마인드도 내가 지금껏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일한 시간만큼 보상은 확실하게, 공정하게 해준다는 것. 그리고 일하는 곳에선 누가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전에 무슨 일을 했던 나이가 몇 살이든 그런 건 상관없고 지금 하는 일만 열심히 잘하면 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 있다 보니 ‘나도 이런 조직에 정식으로 소속되어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찾아보니 그 방법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목표가 있기에 견딜 수 있었던 시간

일단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자격증을 따고 파트타임과 병행하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시험 5개월 전부터는 전업으로 전환했다. 근무 시간 자체는 얼마 안 돼도 일하러 가기 위해 씻고 준비하고 이동하는 시간이 너무 컸다. 그렇게 아낄 수 있는 시간을 다 아끼면 하루 온전히 12~14시간 정도는 공부에 할애할 수 있었다. 매일 공부한 시간과 내용을 기록해뒀는데 5개월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더라. 좋아하는 운동도, 영화 등 취미 생활은커녕 집앞 산책이나 지인들과 연락도 거의 끊고 지냈다. 어느 시점엔 유튜브 보는 것보다 강의 보는 게 더 재밌었고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보다 한글자라도 더 보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매일 혼자서 공부만 하다 보니 별의별 잡생각이 다 들어서 괴롭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래에 합격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 외롭고 고된 시간들을 버텨왔다.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학창 시절의 나는 그냥 딱 중간이었다. 중학교 때도 안 좋은 고등학교는 가기 싫어서 적당히 공부해서 중상위의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대학도 그냥 그랬다. 취업할 때 학점도 필요하다니까 적당히 4점에는 맞추자 싶어서 딱 그 정도만 했던 것 같다. 이번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아,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를 제대로 배웠다. 학창 시절에 내가 이렇게만 공부했다면 훨씬 더 좋은 대학에 가고 훨씬 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모르는 건 끝까지 보고 알고 난 다음 넘어가기, 10번 봐서 안되면 20번 보기, 스스로 공부계획을 세우고 진도 나가기. 선생님을 믿고 좋아하기 등 막상 해보니까 다 되는데 예전에는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갔고 머리 쓰기 싫어서 어려운 건 귀를 닫고 안 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때도 이걸 알았다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시험을 치르고 나서.

모의고사와 실전은 역시 달랐다. 처음에 술술 풀리다 어려운 문제에 막혀 시간을 지체했더니 남은 시간 20분..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많은데.. 심장과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시간에 쫓겨 답안지를 제출했다. 별표 쳐놓은 문제를 다시 훑어보고 마무리했던 모의고사 때의 시뮬레이션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80분 만에 나의 8개월이 끝났다. 허탈하기도 했고 홀가분 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묘한 감정들이 공존했다. 빨리 정답을 매겨보고 싶은 마음보다는 일단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근데 맘처럼 쉬어지지가 않았고 가답안을 체크하고 커트라인을 보느라 남은 하루를 정신없이 보냈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는데 희망이 점점 사라지면서 몇시간만에 내 마음도 접혀갔다.


아름다운 이별

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직도 남녀 관계에 이 말은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만, 나와 공시생활은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진짜 최선을 다했고 아는 문제를 틀려서 아쉬운 건 있지만 고민하다 찍은 게 맞은 것도 있기에 샘샘이라 생각한다. 내가 공부한 만큼의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만약 점수가 더 낮았다면 '역시 난 안되나봐' 이러고 자책하며 지냈겠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을 걸어 본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간절하게 진심으로 임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후회도 없다. 그리고 단기 초시생이 이정도 점수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대운이 들어야 합격하는 시험

어떤 사람은 몇 개월 만에 합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몇 년을 준비해도 떨어진다. 흔히 ‘공무원 시험은 포기만 안 하면 붙는다’라고 하는데 그 말을 믿고 싶지만 내가 준비한 직렬은.. 그 과정이 유난히 고통스러운 것 같다. 범위도 시험 몇개월 전에 공개되고 매년 커트라인도 몇십점씩 널뛴다. 올해 시험은 기본 과목이 너무 쉬워 변별력이 없었고 특정 과목의 난도가 엄청 높았는데 심지어 시험 범위를 벗어난 부분에서 나왔다. 찍신이 오지 않는 한 합격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전년 대비 평균점수가 대폭 올랐고, 아마 내년에는 또 난도 조절을 위해 변화가 있을 거 같다. 또 어느 기준에 맞춰 공부해야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무엇보다 스펙쌓기 보다 훨씬 힘든 '운'이 필요한 시험.. 내 삶에 대단한 불운은 없었지만 또 그만한 대운은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이번 한 번의 경험으로 공시와는 아름답게 이별하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너무 우울감에 빠지진 않았다는 거다. 결과가 불합격이라고 해서 지난 수험 기간 모두가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지식적으로 습득한 것도 많다. 그래서 마냥 우울하게만 생각하진 않으려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도 막막하고 공부하느라 까먹은 돈 메꾸려면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할 텐데 심란하긴 하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랬듯 죽으란 법은 없고 먹고 살 길은 있겠지..

작가의 이전글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