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조직 문제 8.
A사는 근속 기간 5년을 채운 직원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주었다. 직원들은 이런 회사의 복지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회사로부터 여행 경비를 지원받아 여행을 다녀오는 직원은 다들 하나같이 사장에게 줄 선물을 자비로 사가지고 왔다.
“한 팀장, 이번에 가져온 술 좋더라.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던데?”
사장이 이번에 5년 근속 여행을 다녀온 한 팀장에게 지나가는 말로 전했다.
얼마 뒤 근속 여행을 다녀온 신 팀장은 더 비싸고 좋은 술을 선물했다. 구 본부장은 고급스러운 찻잔 세트를 선물했다.
직원들 여행 경비나 복지는 전부 다 회삿돈으로 쓰지만 호사는 사장 혼자 누렸다.
사장 아들파와 부사장파의 권력 투쟁. 그 아래 전무, 이사, 부장, 차장에 이르는 라인 다툼과 견제. 이런 사내 정치는 TV 드라마나 내가 가볼 수 없는 대기업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다(물론 현실에서는 사장 아들파가 질 리가 없다). 그런데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작은 회사에서도 사내 정치는 벌어졌다.
작은 회사에서 사내 정치란 소위 ‘사장에게 잘 보이기’였다. 어떤 회사에서는 사장이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임원들이 주말에 일손 돕는 일을 자처했다. 그리고 서로 나는 몇 번 갔다 왔다 하고 누가 사장하고 더 돈독(?)한지 겨루었다.
막상 회사 규모가 크다고 해서 ‘사장에게 잘 보이기’는 바뀌지 않았다(대기업이라고 해도 사내 정치가 더 분화되었을 뿐이지, 그 방식은 다르지 않다. 사장, 회장 얼굴을 보지 못하는 직원은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 경쟁한다). 정치라 하면,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한 투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회사 최고 권력자는 바뀌는 일이 없다. 아래서 투쟁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대기업도 회장 아들이 또 회장이 되는 판국에 그보다 작은 기업은 오죽할까). 회사 조직이 1인자가 공고한 수직 구조이다 보니 사내 정치의 최고 목표는 ‘사장에게 잘 보이기’가 되었다.
“회사가 어렵다”라는 무서운 말이 있다. 이 말이 사장 입으로 나온 순간, 모든 직장인은 긴장하게 된다. “회사가 어려우니 다른 기업보다 좋은 성과를 내도록 잘해보자”의 의미가 아니라 “회사가 어려우니 너희들 월급이 안 나올 수도, 누군가는 잘릴 수도 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미리 사장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경쟁 체제에서 질 수 있다는 거다(사장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 회사에서 조금만이라도 복지 혜택을 준다면, 생색내기 바쁘다).
우리나라는 외환 위기(IMF 사태)를 겪으면서 평생 직장이 사라졌다. 언제라도 잘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은 직장인의 무한 경쟁을 낳았다. 직장인은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경쟁했다. 직장인 간 경쟁 체제에서 ‘평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평가를 내리는 주체는 늘 경영자이다 보니 경영자에게 잘 보이려는 경쟁이 심화됐다. 기업 간 경쟁보다도 직장인에게 중요한 건 조직 내 경쟁이었다.
경제 성장과 함께 기업이 거대해지면서 기업이 기업을 낳고, 기업 구조는 세분화되었다.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팀’이 만들어졌다. 팀은 스포츠 팀과 닮았다. 스포츠 경기처럼 팀 간 경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다른 팀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내야만 승리하니까. 하지만 스포츠 팀이 선수가 잘 못하면 감독이 경질되는 것과는 달리 회사 팀 책임자는 바뀌지 않고 선수들을 내쫓았다. 팀 간 경쟁에서 또다시 개인 간 경쟁으로 직장인은 내몰렸다.
회사의 최고 목표는 기업 간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일 텐데, 기업 전체 성과가 떨어져도 1인자는 책임지지 않으니 기업 간 경쟁은 팀 간 경쟁으로, 또 팀 간 경쟁은 개인 간 경쟁으로 변질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