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5일
간만에 다시 병이 도졌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앉아 오랜 시름을 겪는다.
화장실에서 시간 보내기엔 일간지 만한 게 없지만
대신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페이스북 친구가 공유한 글에서 시선이 멈춘다.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두 노인네의 시선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글이다.
두 노인, 이문열과 황석영이다.
내 블로그에서도 이문열과 황석영을 비교(?)한 포스트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되짚어보니 별로 쓰잘데기 없어 보였던지
내 성에 차는 글이 딱히 보이질 않는다.
그리하여 병도 도져 새벽에 잠도 없어진 마당에
이런 글이나 지껄여 볼까 한다.
나는 등단을 먼저 한 황석영 보다 이문열을 먼저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문열은 대중적인 인기 반열에 들어서는 루키 스타였고
고등학생인 나는 아무래도 대중적인 스타에 친숙했다.
처음 접한 이문열은 다름 아닌 '사람의 아들'이었고
그것은 당시 데미안의 아프락사스 따위에 빠져있던
한 명의 고등학생에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나는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맞나?)를 따라가며
내가 지니고 있던 종교적 회의와 사회적 괴리감 등속의 사유를
대리하는 일종의 간접 경험의 카타르시스를 겪게 된다.
이러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집어 든 또 하나의 문제작이
3편의 연작 소설 '젊은 날의 초상'이다.
이 젊은 날의 초상은 항상 그 시절,
나의 젊은(어린) 날의 군상들과 버무려지곤 했다.
소설 속의 대사 하나하나가 나의 술자리 밑반찬이 되기 일쑤였고
상황 하나하나가 종종 나의 현실과 맞닥뜨리는 데자뷔가 되곤 했다.
그리하여 다시 이문열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한곡부터 다시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위키에 나오는 이문열의 주요 작품을 따라가며 읽어 본 것을 나열해 보자면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젊은 날의 초상》
《금시조》
《영웅시대》
《변경》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삼국지》(평역)
《초한지》 - 읽다가 말았음
《레떼의 연가》
《호모 엑세쿠탄스》 - 읽다가 말았던 것 같음
《선택》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시인》
기타 《필론과 돼지》, 《금시조》, 《구로아리랑》,《들소》 등의 단편들 정도이다.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는 4번 정도 읽었던 것 같다.
그때도 그랬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이문열의 소설은 헷갈리는 구석이 많았다.
헷갈림에는 크게 두 가지 가닥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의 문체에서 비롯되는 컨텐츠 외형적인 측면이다.
어릴 적 나는 그저 그가 많이 배운 점잖은 집안의 기품 있는
다시 말하자면 한학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내깟 정도로는 그 기품을 모두 따라가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어쨌거나 이건 좋게 말한 거고...
일단 이문열은 글을 어렵게 쓴다.
평론가들은 그의 글이 쉽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한자적(이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사여구를 사용한 표현을 많이 들먹이고
꽤나 현학적이고 고압적인 문체를 구사한다.
내가 이만큼 알고 이만큼의 현학적 편력을 지니고 있는데
너 까짓 게 알아먹으려면 알아먹어봐라라는 식으로 소설을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어릴 적 나는 읽고 따라가는 내내
- 그렇다 어린 나의 경우엔 따라가는 형국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던 것 같다 -
그의 혀가 이끄는 대로 우지좌지 했다가 책을 덮으면서 한숨을 쉬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음... 심오한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딱 요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다른 하나는 특히 구로아리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작품에서와 같이
그의 정체가 많이 헷갈리게 되는데
그가 던지고자 하는 화두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빨갱이였고 연좌제로 고생했다는 이력은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내재되고 발현되는지
나로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꽤나 복잡한 아이덴티티를 지닌 것 같은 인간 군상들이
예의 지식의 창고방출 같은 화려하고 수려한 인용이나 미사여구 잔치를 벌이다가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결말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게 뭔지 헷갈리곤 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소설 속엔 항상 영웅이 존재했고
시대는 영웅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그의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역사는 어떤 영웅에 의해 쓰여진다고 보는 것 같았다.
한창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읽다 보면
그는 자신의 의도에 교묘하게 트랩을 걸어놓고
나 같은 풋내기 독자들을 거미줄처럼 낚아챘다.
아마도 영웅은 나 같은,
날파리 같은 존재를 먹고 자라나 보다.
황석영은 소설보다는 연극으로 먼저 접했다.
당시 신생극단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연우무대가
대학로에서 무대에 올린 "한 씨 연대가"가 그것이다.
양희경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 연극은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관람하게 되었다.
내 기억에 연극을 돈 내고 봤을 형편은 아니었으니
선생님께서 어찌어찌 방편을 만들어 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친가가 이북 출신이어서 어떤 요소요소에 있어서
공감되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다는 것과
대학가 근처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시대 분위기에 조금씩 눈이 떠지던 시기라는 점에서
뭔가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는 기억 정도가 전부이다.
그냥 그러고 있다가 대학교에 들어서면서
황석영을 다시 만나게 되는 데
물론 시작은 알게 모르게 접하게 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다.
광주 학살의 생생한 사실을 담은 이 책은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였고, 당연히 금서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황석영이란 이름 석 자가 각인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문학인으로서 황석영을 접한 건
공강 시간에 학교 도서관에 들러 짬짬이 읽던
몇몇 문학지에서였다.
그 처음은 세계의 문학에 연재되었던 걸로 기억하는
월남전 얘기 '무기의 그늘'이었다.
이어 얼떨결에 단편집 '객지'를 접하면서
비로소 황석영이라는 문인을 만나게 되고
그가 바라보는 사람과 사회를 알게 되었다.
- 이때 한씨연대기도 다시 읽게 된다 -
나의 예전 회사 후배였던 某 재선이는
황석영을 '천상 이야기꾼'이라고 표현했다.
- 나는 야부리라고 했지만... -
하지만 쉽게 쓰여진 것 같은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주체적으로 삶을 책임지는 끈끈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거나
혹은 거대한 세계적 폭압에 의해 무기력해지는 어떤 개인을 만나게 되곤 한다.
그의 이야기에는 나 또는 주변에서 보아 온 그런 인간 군상들이 담겼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영웅이나 소소의 엘리트가 아닌
백성과 민중이, 사람이 만들어가는 변화와 진보를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의 색깔은 분명했다.
역시 개인적인 관심사로써 위키의 도움을 받아
읽은 목록을 정리해 봤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삼국지》
《객지》
《삼포 가는 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희곡 《장산곶매》
또한 권수로는 아마 우리 집에 있는 작가의 책 중에 단연 최다 권수를 자랑할 것이다.
삼국지, 장길산만 해도 20권이니
아무리 박경리의 토지가 21권이라 해도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종종 이문열과 황석영을
이현세와 허영만을 비교하듯이 비교하곤 했다.
딱히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이문열의 소설 속에서는 어디선가 낯설지 않은 모습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한 작품 만은 명백하게 비교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 이영래와 엄석대의 싸움이랄까?
대학교 시절 복학 후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고문으로 앉게 된
어떤 동아리 세미나 모임에서
내가 신입생에게 주었던 과제 중에 하나가 이것이기도 했다.
그 신입생들이 92학번이었지 아마?
이 글을 쓰려고 새벽이 일어나서 책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먼저 황석영 칸에서 객지를 손쉽게 찾았다.
'아우를 위하여'는 소설집 객지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다음으로 이문열 칸으로 옮겨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찾는다.
캐나다 까지 오면서 책을 다 가지고 올 수는 없었기에
지원이와 승원이가 나중에라도 꼭 봤으면 싶은
그런 책들만 얼추 챙겨 오느라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책장에 없다.
그렇다면 분명 버리고 온 모양이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이문열과 그 소설이 좋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언급하는 그것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워낙 유명세를 탔고
아이들 교과서에도 나온다는 얘기도 들었기에
내용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기본적인 플롯 자체가
학급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해결을 통해
한 시대의 사회상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같다.
- 물론 1972년 신동아에 발표된 '아우를 위하여'가 1
987년 6월에 발매된 '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 보다 빠르다.
파리대왕이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난파된 아이들의 생활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벌거벗은 인간성을 고발하였다면
이 두 작품은 아이들의 학교/학급으로 그 공간적 배경을 바꾸고
권력과 저항 등의 사회적 갈등과
인간관계의 부조리를 그 속으로 옮겨놓았다.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누가 누구를 베꼈느니 어쨌느니 하는
이 따위 얘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갈등의 해결 방식과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겪은 학급 구성원들의 태도이다.
이문열은 클라이맥스로 향하던 갈등의 극복과 해결을
김 선생님의 등장이라는 한 방으로 끝내버린다.
김 선생님은 그동안 학급에서 벌어졌던 패악을 수습하고
모든 질서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제서야 주인공 병태를 비롯한 학급 아이들은
그간의 권력자(엄석대)를 불평하고 그에게서 돌아서는
한편으론 비열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로 묘사된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절대악-권력이 지배하던 세계를
선한 능력자-메시아로 인해 물리쳐 질서를 되찾게 되고
그 안에서 굴종하던 사람들은 새로운 권력에 환호하고
다시금 새로운 복종의 길로 들어서는
지극히 피동적이고 저열한 군상일 뿐이다.
반면에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새로운 유형의 교생 선생님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나'에게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넘어서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던져 불을 댕긴 것은
자각한 '나' 자신이며
그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힘'은
불의에 억눌려왔던 학급 친구들의 단합된 행동이었다.
결국 '그들'이 스스로 힘을 합쳐 권력자-영래를 물리쳤다.
여기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어떤 특정 영웅이나 권력자가 나타나
불의하거나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변화하고 행동해야 됨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나'와 '너'의 '우리'가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웅변한다.
여기서 민중은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동하고 이끌어내는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이 스스로 그러한 자각에 이르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이다.
그리고 나는 황석영의 방식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새벽에 변기에 앉아서 페이스북을 보면서
이 글을 생각했는데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그 사이 승원이 하키와 파티에 갔다 왔고
마트에도 다녀와야 했다.
끼니를 때우고 치우는 일과
집안 청소도 시간을 뺏는데 한몫했다.
그리고 이젠 예전 같지 않아서 이런 글이
어색하고 잘 쓰여지지도 않는다.
보통은 한 번 쓰고 나면 다시 되읽으며 부적절한 오류나
잘못된 표현을 바로 잡을 텐데
그럴 마음도 일지 않는다.
엊그제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별일 없냐는 메신저가 왔고
나는 박근혜 탄핵이 글러먹은 것 같아서 문제지 별일이야 있겠냐? 면서
농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누구는 이 사람들을 아리랑 축전에 동원된 인민 취급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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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이 포스팅에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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