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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캐럿 Jan 12. 2022

사부작사부작

얼마 전 3박 4일 출장을 다녀왔다.

휴대폰을 제출하고 SNS가 금지되는, 즉 세상과 단절(?)된 출장이었다.

그래도 집안일 안 하고, 아이들에게 잔소리 없이 일만 하면 되겠거니 싶어 슬쩍 기대하면서 짐을 챙겼다.



첫째 날. 

일정도 빼곡했고 처리해야 하는 일도 묵직했다. 

낮의 일과 중 쉬는 시간도 짧았고, 숙소 방으로도 밤 10시에나 들어갔다.

피곤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1인 1실의 공간만으로도 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다. 

핸드폰이 궁금해 안절부절못해지는 거다.

인스타그램의 새로운 피드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고, 특별히 올 일 없는 카카오톡 소식도 궁금했다.

평소 그렇게 핸드폰을 많이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적잖게 당황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아. 핸드폰 중독 증세가 있구나. 를 보았다.

또 걱정도 밀려왔다. 

애들은 잘 있으려나, 조바심 나는 일들은 잘 해결되려나, 할 일 마무리가 안 되었는데 괜스레 마음의 부담만 커져가고 있었다.

찻잔도 챙겨가서 가지런히 놓아두고, 책도 넉넉히 챙겨갔는데 쉽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도 뭔가 허전했다. 

TV 채널 이리저리 돌리며 어영부영하다 잠들었다.



둘째 날. 

첫날보다 하루 일과를 조금 일찍 끝냈다.

황금 같은 이 시간을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았다.

TV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묘한 자존심도 올라왔다.

그러다가 뭔가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작사부작 나랑 놀아보기로 했다.


가져간 예쁜 찻잔에 아주 느릿느릿하게 차를 우리고 천천히 마셨다. 

음. 향긋한 맛이 오랫동안 입 안에 가득했다. 

이 느낌이 재밌어서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또 창 밖을 내다보며 멍을 때렸다. 

쪼끄맣게 보이는 퇴근길 차량 행렬, 하나둘씩 들어오는 아파트 불빛..

그저 멍. 하니 있었다. 

멍.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 멍이 참 편했다.

평소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시간에 멍이라니 호사가 따로 없었다.



다음으로 책을 읽었다.

외출만 해도 책은 두 권 이상 챙기는 습관이 있다. 

재미없을 때를 대비해서다. 

이번도 역시 여러 권의 책을 챙겼다.

약속해서 읽어야 하는 책, 재미로 읽는 책을 요모조모로 봤다. 

평소에는 진지하게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면 이번엔 대강 설렁 책장을 넘겼다. 

눈대중으로 뒹굴거리면서 놀면서 읽었다. 


이 또한 편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종이와 볼펜으로 글을 썼다. 생각나는 할 일도 쓰고, 일기도 썼다.

평소에는 블로그에 비공개 일기를 쓰는데 이번은 종이에 썼다. 

생각이 훨씬 빨라 키보드 치는 것보다 아주 느렸고 팔도 아팠지만 종이에 쓰는 일기도 매력 있었다.

천천히 쓰니 생각도 느려지고, 뭔가 차분해지는 기분이 마음에 들었다. 

종이에 하는 의미 없는 낙서와 그림도 재밌었다.



요가를 했다. 

요린이라서 할 줄 아는 동작이 몇 개 없어도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요가매트. 

당연히 없었다. 

그래도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엄마의 근성으로 이것저것 찾다가 샤워타월을 바닥에 깔아보았다.

오. 요가매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구색이 갖추어졌다.

기억나는 자세를 취해본다.

온몸이 여기저기 당겼다.

수업 중 선생님이라면 3분, 5분 이렇게 하셨겠지 상상하면서도 그렇게 힘들게는 할 수 없어하면서 자문자답하면서 했다. 

거울도 없고, 선생님도 안 계시니 자세가 바로잡힌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이 나고 다리가 후덜 거리는 것으로 보아 스트레칭의 효과는 충분했다.


이렇게 사부작사부작 놀다 보니 시간이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내 마음은 편안했고, 그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셋째 날도 역시 마찬가지로 차를 마셨고, 책을 읽고, 일기를 끄적거리고, 요가를 했다.

시간이 평안하게 흘렀고, 나도 고요해졌다.


부담스러운 일을 했어도 오랜만에 쉬었고, 편안했고, 행복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늘 조건절을 달았었다.

돈이 많다면, 일이 한가해진다면, 해결해야 할 이 문제가 없다면, 저 사람이 나아진다면, 저것 때문에... 나는 행복하기 어렵다. 의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보았다.

행복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아주 소소한 것으로도 마음을 쉬고 행복할 수 있구나.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구나.

물론 사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있어야만 행복하다. 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출장 후 집에 오니 잔소리꾼 엄마가 없는 집의 일상도 편안했다.


다시 한번 느낀다.

지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너무 안달복달하지 말고, 마음 들볶지 말자.

합리화하지 말고, 탓하지 말고, 단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힘 있게 선택하고 할 것을 하면 되는구나.

있지 않는 일, 할 수 없는 일, 나에게 힘 빼는 일은 선택하지 않도록 하자. 가 키워드임을 말이다.



핸드폰과 TV 없이 사부작사부작 나랑 노는 선물은 아주 달콤했고, 그래서 편안했고, 행복했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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