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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나 Feb 21. 2019

제주에서 적는 이야기

ㅡ박현호 님의 글


오랜만에 너무 좋은 글을 읽어서 한 편 소개해드리려고 가져왔다.

이곳 제주에서 지내며 나와는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경험을 글과 이야기로 공유한다.

재미있는 작업이다.


       



                          

스페인 순례길

걸어야 한다. 걷기 싫어도 걸어야 한다. 걷기 위해 왔는데 걷기가 싫다니. 아픈 다리를 이끌고 몇 시간을 걸으니 금방 또 익숙해졌다. 앞서간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조금 속도를 높이니 계속 아프던 오른쪽 다리가 압정에라도 찔린 듯 콕콕 쑤셔온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꽉 졸라 묶은 신발을 벗어 던졌다. 더 이상은 걷기 힘들 것 같아 얼굴을 찌푸린다. 신세한탄이라도 하듯 혼잣말로 욕을 퍼부었다. 어차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는데, 작정하고 몇 마디의 욕을 더 하던 찰나에 독일어 몇 마디가 들린다. 내 쪽으로 다가와선 '너 괜찮니?' 라며 자기가 가진 약을 나눠줄 모양이다. 키가 굉장히 큰 독일 여자.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괜찮다고 조금 쉬면 된다고 사양해보지만 이미 가방에서 진통제로 보이는 약을 꺼내어 건네고 있다. 한 알밖에 안 남았다. 반은 지금 먹고 나머지 반은 다시 아프면 먹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럼 고생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쿨하게 갈 길을 갔고, 외국어를 다 알아듣기도 힘들어 열심히 오케이, 오케이만 하다 고맙단 이야기를 못했다. 약을 먹고 어느 정도 통증이 완화되는 것 같아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녀를 쫓아가려고 열심히 걸어, 목표한 마을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아마 그녀도 이 마을에 묵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바나 레스토랑을 몇 군데 찾아 돌아다녔지만 그녀는 없었다. 걷다 또 만나겠지 했지만 결국 마주하지 못했고, 빈 약봉지만 꼭 챙겨 그 때 약을 나눠준 독일의 천사를 가끔 생각하곤 한다. 


단양

한드미길 29-1번지. 넓은 평상과 작은 마당, 딸기를 심은 화단. 연탄 보일러가 낡아 한참을 태워야 따뜻해졌던 나의 집. 방 세 칸에 나와 네팔에서 온 아니시, 그리고 우프를 위한 게스트 방까지. 항상 북적북적한 아지트. 봄에는 땅이 녹고 싹이 올라온다고 모여서 밤새 한 잔, 여름엔 시원한 평상 위 풀벌레 소리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삼삼오오 한 잔. 가을엔 왕 대추 나무에서 딴 애기 주먹만한 대추와 또 한 잔, 겨울에는 연탄 보일러실에서 오징어 구워 먹으면서 한 잔. 수많은 사람이 오고갔던 나의 집에서 떠나는 날 유난히 더 작고 낡아 보여 자꾸만 돌아보다 사진 한 장을 찍고 서야 떠날 수 있었던 나의 집.


제주 

연노로 12, 401호. 9평 남짓 작은 방에 오밀조밀하게 놓여 있는 TV, 냉장고, 에어컨, 옷장, 그 사이사이 더 오밀조밀하게 붙여놓은 포스터와 누가 봐도 술 좋아하는 구나, 라고 생각할 수집한 맥주 잔들. 쌓여가는 설거지와 치킨 박스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에 항상 대청소를 했다. 일 끝나고 돌아와 조명만 켜놓고 봤던 영화들, 임대 기간이 만료 되어 정리를 하다 이 좁은 집에 챙겨야 할 게 왜 이렇게 많고 쓸데없는 건 또 왜 이렇게 샀는지. 버리려고 해도 아까운 마음에 결국 챙기니 짐은 늘어만 가고. 남은 짐을 또 찾으러 가야 하니 그 때 이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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