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어릴 적
한글을 떼고 제법 능숙하게 글을 읽을 줄 알게 될 무렵 즈음 엄마가 명작이라고 하는 알퐁스 도데의 별과 함께 어린왕자 책을 사주었다.
그게 내가 처음 읽은 어린왕자였다.
"양 한 마리만 그려줘"라고 했을 때 결국 상자를 그려준 이야기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가 그나마 흥미로웠고 그 뒷 부분은 거의 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샀던 책 '어린왕자'는 맨 앞장 코끼리 그림이 있는 부분만 몇 번을 반복해 읽은 탓에 진한 4B 연필로 밑줄과 지운 자국이 얼룩덜룩하고 뒷부분의 책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을까
당시 유행했던 플래시 영상인 '꽃과 어린왕자'를 통해 다시 한 번 어린왕자를 접하게 되었다.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왜인지 모르겠는데 학교에서 이 영상을 자주 틀어줬고 종종 따라 부르게 되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저 별들 중에서
유난히도 작은 별이 하나 있었다네
그 작은 별엔 꽃이 하나 살았다네
그 꽃을 사랑한 어린왕자 있었다네
꽃이여 내 말을 들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어린왕자 그 한 마디 남기고 별을 떠나야 하였다네
꽃은 너무 슬퍼서 울었다네
꽃은 눈물을 흘렸다네
어린왕자는 눈물을 감추며 멀리 저 멀리 떠났다네
한 해 두 해가 지나간 뒤 어린왕자 돌아왔다네
하지만 그 꽃은 이미 늙어버렸다네
왕자여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꽃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만 시들어 버렸다네
어린왕자는 꽃씨를 묻었다네 눈물을 흘렸다네
어린왕자의 눈물을 받은 꽃씨는 다시 살아났다네
꽃은 다시 살아났다네
하늘 가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 때 당시 이 노래를 자주 들어서 아무 때나 생각날 때면 종종 흥얼거렸던 기억이 있는데,
새삼 다시 들으니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지 몰랐던 거 같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문학을 배우며 또 한 번 어린왕자를 읽었다.
당시에는 장미가 핀 붉은 벽돌집에 사는 친구가 아닌 몇 평짜리 집에 혹은 얼마짜리 집에 사는 친구로 기억하는 어른들에 대한 내용이나 '세 시가 되면 내가 떠오를 거야' 라고 했던 여우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 사춘기 때면 으레 그렇듯이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고 또 믿음이 배신당하는 과정들을 겪으면서 진정한 관계란 결국 장미가 핀 붉은 벽돌집과 같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세 시가 되면 생각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선생님은 어린왕자에 숨은 수많은 메타포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른이 되면 언젠가 어린왕자를 읽으면서 펑펑 우는 날이 올 거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어린왕자에는 크게 울 만한 내용이 없는데?'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내가 생각하는 양과 네가 생각하는 양이 다른 것
잠시 소홀했던 사이에 나를 기다리던 장미꽃이 죽어버린 것
오후 세 시가 되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여우와의 추억
그리고
온갖 별을 다 여행하고 돌아온
어린왕자가 어느 날 새벽, 뱀에 물려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것
‘이 책에 크게 슬플 일이 있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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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3개월이 지났다.
'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일 하실 때에는 책 읽으시면 안 돼요"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며 같이 일하는 대리가 짐짓 무거운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선심쓰듯 중요한 팁을 알려준다는 듯한 제스처였다.
"대표님이 요청하신 일 다 해놓고 답변 기다리는 중이라서요. 기획 관련된 책이라 일하고도 관련된 내용이고요!"
"그래도 안 읽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나는 입사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바쁘지 않으면 괜히 검색엔진을 뒤적거리면서, 구독해놓은 뉴스레터들을 빠르게 훑으면서 제법 바쁜 시늉을 낼 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왜 책을 읽으면 안 되냐' 라고 따져물을 생각이었는데-
혹은 내가 앞장서서 분위기를 바꿔보겠노라 생각했었는데
근무 시간에 유튜브를 보았다던 과장이 잘려나간 것을 본 이후로는 그저 가만히 있게 되었다.
정치질에 휘말린 거라는 말도 있었고, 꼭 유튜브를 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어쨌든 회사에서 눈에 띄게 다른 행동을 하는 건 썩 좋지 못한 일이라는 걸 그 사건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의 그 과장이 연차를 쓴 어느 날, 대표는 팀원 전체와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제로 과장이 업무 과정에서 근무 태만의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면담이었다.
모든 면담이 끝난 후에 대표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대리와 나를 따로 불러 '그동안 과장의 행실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나야 그렇다치고, 대리에게는 왜 알면서도 말을 안 했냐는 원망의 눈초리가 꽂혔다.
대리는 그저 곤란한 기색을 내비칠 뿐이어서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몰랐다고 하면 그걸 모르는 것도 문제가 있는 거고, 알았다고 하면 알면서 몇 달동안 지금 과장 하나 때문에 우리 회사에 난 로스가 얼마야. 월급이 얼만데. 그걸 말을 안해주는 게 말이 돼? 그럴 거면 경영전략실이 왜 있는 건데' 하며 열을 올렸다. 무엇보다 대표는 본인이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장이 그동안 업무 태만이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빼고는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리는 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조용히 '그걸 내가 왜 말하느냐'며 소근거리며 익살맞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에게는 말을 해야 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화창하게 맑은 다음 날이 찾아왔고, 대표는 과장을 호출해 면담을 가졌다.
면담을 나누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보였고, 회의실 사이로 가끔 밝은 웃음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면담이 끝나고는 서로 악수를 하며 '다음에 또 보자'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고,
그렇게 그 과장은 그날 바로 조용히 회사를 떠났다.
내가 낯설다고 느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회사를 나가기까지, 그동안 아무도 그를 나쁘게 대한다든지 조언을 한다든지 큰 소리를 내며 싸운다든지,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내가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기를 결심하면서- 그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 울고 또 서로를 비난하고 크게 싸우며 뒤엉켰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을 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던 중,
중요도가 낮고 급한 일을 빨리 처리해서 넘긴다고 넘기느라 놓친 부분이 생겼다.
그러자 대표는 나를 자리로 불러 "아니, 왜 일을 이렇게 하냐고" 했다.
과장의 뒤를 이어 두 사람이 연이어 더 퇴사를 한 직후였다.
보통 대표는 일을 할 때 피드백을 깔끔하게 주는 편이었고 일에 감정을 잘 섞지 않는 편이었는데,
유난히 말에 불편한 감정이 잔뜩 섞여 있었다.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새 나도 자연스럽게 적응을 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가진 생각이나 감정을 굉장히 잘 표현하는 편이고 소통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낯선 나의 모습이었다.
"그래야 내가 이런 일을 안 시킨다든지 방법을 찾을 거 아니야"
라는 말에 그제야 진짜로 내가 이 일을 하기 싫어서 일부러 엉망으로 했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았고,
그제야 나는 하기 싫어서 그렇게 했던 게 아니고 이미 아는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하는 부분이라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인지해 놓친 부분이 생겼던 것 같다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짧게 "그래? 알았어" 하고 대답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대표가 직원들에 대해 그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작든 크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크게 사람들의 생각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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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잇따라 퇴사한 후, 잡코리아에 안좋은 내용으로 회사에 대한 평가가 올라왔다.
퇴사율이 높은 회사이며, 지시가 일방적이라는 내용이었다.
대표는 당연히 지난 번 퇴사한 과장일 것이라 생각했고, 신경쓰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했다.
하지만 내 짐작에는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범인으로 짐작가는 사람에게 잡코리아에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며 회사 소식을 전했고,
화가 난 대표님이 이를 갈며 신고를 하려고 알아보는 중이라 정신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조용히 글이 내려가 있었던 걸 보면, 나는 내 짐작이 맞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단지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곳에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나 기회가 많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지고보면 그 글에는 틀린 말도 없었지만,
사실 맞는 말도 없었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게, 어쩐지 조금은 슬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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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는 장미꽃과 이별한 후, 여러 별들을 떠돌아다니면서 별들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으로 만난 행성에 사는 사람은 왕이었다. 그 왕은 붉은 옷에 하얀 담비 모피로 된 옷을 입고, 매우 검소하면서도 위엄 있는 왕좌에 앉아 있었다.
"아! 신하가 한 명 왔구나!"
어린 왕자를 보자 왕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어린왕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볼까?"
왕들에게는 세상이 아주 단순하다는 걸 어린 왕자는 몰랐다.
왕에겐 모든 사람이 다 신하인 것이다.
"그럼 그대는 네 자신을 재판하라.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니라. 다른 사람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재판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로다. 그대가 자신을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다면 그대는 정말 현명한 사람이니라."
"제 자신을 재판하는 것이라면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할 수 있어요. 꼭 여기에 살 필요는 없어요."
어린왕자가 대답했다.
"안 돼, 가지 말라"
왕이 말했다.
"폐하의 명령에 복종하길 바라신다면 제게 정당한 명령을 내려주세요.
이를 테면 1분 안에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실 수도 있잖아요.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요."
그러자 왕은 황급히 외쳤다.
"짐은 그대를 대사로 임명하노라!"
그는 잔뜩 위엄을 부리고 있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
어린 왕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여행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는 어린왕자에 대한 생각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내가 있던 곳이 아닌 낯선 곳에 적응을 하는 중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아님, 선생님이 말했던 것처럼 어린왕자에는 숨어 있는 메타포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나도 결국 어린왕자처럼 내 행성으로 돌아가는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나 역시도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만의 행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넓은 세상을 보았고,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했다. 그러고 보면 분명 어딘가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행성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시기에,
이 책 속에 나에게 필요한 메세지가 숨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떠올린 어린왕자의 결말은 뱀에게 물려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책을 뒤적여보았다.
어린왕자가 '삶이란 결국 죽음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것'이라는 메세지만 남기고 떠났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결말의 내용을 발견했다.
"하늘을 보라.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양이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이 세상이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