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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나 Aug 31. 2018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ㅡ 토마토밭 이야기



빨갛게 익은 토마토만 따야하는데 덜 익은 토마토를 따 섞어 넣는 바람에 오늘은 지적을 많이 받았다. 내 눈에는 전부 빨간 토마토로 보이는 바람에 그 안에서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와 불그스름한 토마토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토마토를 따는 할머니들은 거침없이 새빨간 토마토만 골라 컨테이너에 담아 넣는다. 단순히 토마토를 따는 것이 뭐 어렵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새빨간 것인지 불그스름하게 덜 익은 것인지 살펴봐야 하고, 토마토 꼭지가 떨어지지 않게 따야 하는데다 따면서 줄기가 다치지 않게 해야 하는 등 하다보면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빼고는 다들 손이 눈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척척 따고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떤 게 빨갛게 익은 토마토인지 찾아보세요!




끝도 없이 펼쳐진 토마토밭!



그렇게 새벽 여섯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열 시간 가까이 다리 사이에 방석을 끼고 쪼그리고 앉아 토마토를 땄는데 내가 딴 토마토는 고작 여섯 컨테이너 정도다. 일이 능숙한 할머니들은 열한 컨테이너 가까이 땄으니 거의 두 배 정도가 차이 나는 셈이다. 무릎이 욱신거리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 내 앞에 놓인 고작 여섯 컨테이너의 방울토마토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요즘에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내 딴에는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니 서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일이 끝나고 나면 속이 발갛게 달아오르고는 했었다. 


오전 시간을 꼬박 들여 딴 빨간 토마토. 빨갛지 않은 것들이 많이 섞여 있어 꾸지람을 들었다.


일이 끝나고 일당을 받아야 하는데 선뜻 손이 내밀어지질 않는다. 농사일에 능숙한 분들과 같은 급여를 받는다는 게 부끄럽게 여겨져 이 순간이 되면 매번 숨이 턱 막힌다. 불그스름한 토마토는 따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땄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 후숙 해야 하기 때문에 따로 또 일일이 골라내야 한다. 일을 두 번 해야 하는 것이다. 불그스름한 토마토가 섞여 들어가면 질이 낮게 평가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도 이 농가의 토마토를 사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번거로워도 어쩔 수가 없다.


토마토 상태가 좋지 않으면 한 번 더 걸러 나가야 한다.

언제쯤 나도 할머니들처럼 능숙하게 새빨간 토마토와 불그스름한 토마토를 능숙하게 구별해내게 될까. 삼춘(제주도에서는 어른들을 거의 다 삼춘이라고 부른다. 여자도 이모가 아니라 삼춘이다) 이 처음엔 다 그런 것이라며, 내 손에 오늘 일당을 꼭 쥐어준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고 산다는 게 원래 다 그렇게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배우면서 묵묵히 하면 된다고 한다. 이런 일로 기가 죽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었다가 제 풀에 지쳐 입에 준 힘을 푼다. 예전에는 버티려고 기를 썼지만, 요즘에는 기가 죽으면 죽는 대로 고개를 푹 숙인다. 그게 이곳 농촌에서 배운 삶의 방식이다.       



나는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가 살라는 대로는 절대 살지 않겠다고  씩씩거렸다. 나는 엄마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볼 거고, 그 세상에서 더 큰 일을 해내고 말 거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지금의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이 작은 섬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있다. 밭일을 하고 있으면 엄마 생각이 자꾸 난다. 사는 게 영 내 마음 같지가 않다고 생각하면 유난히 엄마가 더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요즘 나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에 대해 몇 번을 곱씹고 있는데, 그건 단순히 겸손하게 살라는 뜻만 담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농작물이 익어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 가지는 그동안 빳빳했던 고개가 꺾어지고 휘어진다. 자라나는 새싹일 때는 알지 못했던 제법 묵직한 무게에 온몸이 휘청거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뿌리도 깊어지고 잎도 굵어진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고개가 수그러드는 모양인 것 같다. 내가 겸손해지려고 부러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내 고향은 서울이다. 나는 흑석동에서 나고 자란 아빠와 서교동에서 나고 자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고, 스물다섯 살까지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만 살았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도시 아이, 아파트 단지에서 나고 자라 흙을 밟아본 적 없는 ‘아파트먼트 키드’인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곳 농촌은 사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친숙한 고향의 느낌보다는 낯설고 새로운 경험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그동안 내가 보고 배웠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들이 있어서 이곳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알았던 것들과는 또 다른 것들을 새롭게 배우고 느끼면서 지낸다. 


이곳 농촌 지역에서 나는 농사를 짓는 것뿐만 아니라 매주 수요일, 목요일마다 동일1리 노인회관에서 마을 할머니들과 한글 수업을 하고 있는데, 친할머니나 외할머니와도 생전 함께 지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익숙지가 않아 처음에는 애를 꽤 먹었다. 처음 한글수업을 하기로 했을 때,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두 손을 내저었다. 할머니들이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편지도 쓰고, 직접 쓴 시로 마을에 전시도 하는 등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귀농 생활의 모습을 꿈꿨던 나에게는 꽤나 묵직한 현실의 벽이었다. 그래서 멸치 똥을 빼고 있는 할머니들 옆에 기어이 붙어 멸치 한 줌을 손에 쥐고, 화투를 치는 할머니들께 가르쳐달라고 조르며 두어 달을 지내면서 할머니들과 말 한 두 마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들과 한글 수업 중


할머니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공감대도 생기게 되고 알고 보면 비슷한 점들을 발견하면서 금방 마음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할머니들과 나의 삶은 공감할 만한 부분이 없었고, 전혀 다르다고 느끼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다. 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사이렌이 울려 인근 뒷산으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 숨었던 이야기, 배를 타고 가족들과 육지로 도망치려고 짐을 다 싸두었는데 붙잡혔던 이야기, 그렇게 사람들을 싣고 떠났던 큰 배가 거센 파도에 전복되어 배에 탔던 삼촌이 돌아가신 이야기, 하루 종일 솔나무 가지를 주워 땔감을 만들었던 이야기나 바다에 나가 얼굴만큼 커다란 전복을 잡았고 어망에 걸린 쥐치가 그 안에서 새끼를 낳아 정말 기뻤던 이야기, 생일이면 쌀을 빻아 떡을 만들었는데 콩으로 이름을 쓰면 그렇게 좋았다는 이야기는 내게는 낯설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의 유년 시절에는 애플사에서 나온 신기종 엠피쓰리를 사달라고 졸랐는데 엄마가 사주지 않아 일주일 동안 입을 다물었고, 주말이면 호수공원에서 아빠에게 롤러블레이드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어학원에서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는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져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나의 이야기는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질까. 나는 아침마다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챙겨먹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다양한 지식들을 익히고 배웠다.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나중에 뭐가 될 것인지 무궁무진한 꿈을 마음껏 꿀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내가 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응원해주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사는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갔고 불가능할 게 없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었다. 


할머니들에게 할머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하고 묻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질문도 없다. 그 당시에는 요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계속해서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고, 먹고 살기도 바빴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더 배우고 싶었는데 배울 수가 없었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웠고,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다. 사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그런 할머니들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누누이 내게 세상을 보는 만큼만 보고, 먹는 만큼만 먹으면서 살지 말라고 강조했다. 결혼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했다. 학교든 학원이든 배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배우게 했고, 엄마와 아빠보다 더 좋은 곳에서 일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엄마와 나이가 들어서도 회사에 다니는 아빠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어쩌면 엄마도 나처럼 할머니들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 악물고 삶을 개척해 나갔던 것일까, 돌이켜본다.

“제가 원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요.”

요즘에는 할머니들께 내 고민을 자주 털어놓는 편인데, 말을 꺼내자 할머니들이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그랬어, 하신다. 그러다 나중에는 엄마만큼만 살아도 좋겠다 싶지, 하시면서. 그 말에 나도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들과는 전혀 생각이 다른 줄만 알았는데 모처럼 같은 부분을 발견했다.

나중에는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건지 모른다며 엄마한테 잘하라고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말하신다. 엄마가 멀리 타지에 나와 이렇게 고생하며 농사짓고 있는 딸을 보면 속이 터질 거라며 서울에 있는 엄마 대신 나를 걱정해주시기도 한다. 살다보면 가슴 터지게 억울한 일부터 해서 억장 무너지게 슬픈 일, 눈에서 피가 날 정도로 힘든 일들이 많기도 많다고 한다. 남들 사는 모습은 멀리서보면 좋아 보이고 나보다 처지가 나아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속이 문드러지고 고약한 꼴들로 가득 차 있다고. 사는 게 원래 그런 모양이라 그래도 그저 묵묵히 버티고 사는 게 사는 거란다. 


내일은 마늘 밭에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후부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일이 취소되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내일까지도 계속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워낙 날씨가 변덕스러운 탓에 지켜봐야 하는 일이다. 비가 일찍 그치거나 빗줄기가 얇아지거나 먹구름을 뚫고 해가 비치면 다시 일을 나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다른 일을 하지도 못하고 종일 하늘만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며 일을 하던 때를 생각하면 비가 와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건 여전히 기가 막힌 일이다. 게다가 바람이 많이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리면 마늘이 생각보다 잘 자라지도 않는 데다 그렇게 기를 쓰고 하루 종일 마늘을 뽑아도 하루에 고작 내가 뽑을 수 있는 것은 몇 포대 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제는 별 수 있나, 다음번에는 더 나아지겠지 하고 만다. 그렇게 화를 내거나 기를 써도 달라지는 게 없을뿐더러 사는 게 원래 그런 모양이다, 하고 제법 덤덤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것에 대해 분탕거리며 종종거리는 대신 요즘 날이 풀리면서 부쩍 일이 많아지고 바빴는데 모처럼 한 숨 쉬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내일은 빗소리를 들으며 거실에 대자로 몸을 펼치고 누워 멀리 서울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해야겠다. 나도 엄마처럼만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처럼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를 잔뜩 따 한 상자 가득 담아 보냈으니 이제 허리 좀 펴고 살아도 될 거라고. 그동안 이렇게 내가 잘 익을 때까지 허리가 휘게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그러니 이참에 비가 시원하게 왕창 쏟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건 그 나름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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