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집밥이 커리라고요?
외국이라고 사람 사는 곳이 그렇게 다르진 않다. 먹고, 자고, 입을 것 입고 산다. 사랑도 하고 배신도 있다. 명절에는 모이고, 헤어질 땐 아쉬워한다. 영국도 사람 사는 곳이다. 사는 방식만 조금 다를 뿐 결국은 본질적으로 한국과 마찬가지다. 사실 알고 보면 별 차이도 아닌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작은 차이를 경험하고자 여행, 아니 적어도 낯선 곳으로 간다. 그 다름을 통해서 약간의 긴장 속의 해방과 안락을 느끼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다름에 접했을 때 우리는 - 적어도 나는 -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커리가 꼭 그랬다.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다. 아마 한두 달 정도 되었을까?
석사과정 전에 들었던 영어 수업시간에 어느 누군가가 문득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선생님, 영국인들은 집에서 무엇을 먹나요?"
아마 일본인 친구가 질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그러고 보니 영국에 왔지만 이렇게 자주 만나고 얘기해 본 사람은 영어 선생님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수업 이외 영국 생활 전반에 대해서 알려줄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나마 깨달은 나 역시 그의 대답에 호기심을 갖고 기다렸다.
음~ 커리입니다.
영국인들은 보통 집에서 커리를 먹지요."
아시아 학생이 대부분이었던 교실은 순간 얼음짱처럼 조용해졌다. 커리라니. 아니~ 조금 더 흔하게 쓰는 말로 "카레라고?" 특히 일본인 친구들이 놀란 눈치였다. 일본에서는 커리가 꽤 대중화되었고, 카레가 이미 그들의 식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아 왔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에도 카레는 값싸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조차 카레를 집에서 늘 먹는 음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일본의 카레는 맛이라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 카레의 이미지는 더욱 형편없지 않은가? 수련회에 가면 늘 나오는 반갑지 않은 음식이며, 초중고의 급식 메뉴이자만 결코 인기는 없는 메뉴가 카레다. 바로 그 커리가 영국의 집밥이란다.
순식간에 질문이 쏟아졌다. "왜 커리이지요?" "빵을 먹지 않나요?" "감자가 영국인의 주식인 줄 알았어요." 오히려 당황한 것은 선생님인 듯 이어지는 학생들의 질문에 진땀을 흘리는 듯했다. 나는 이 때 깨달았다. 다를 줄 알았던 영국인의 식생활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영국인들의 주식도 밥이다.
하지만 이를 직접 경험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사람이 한국에 잠깐 들어갔던 어느 가을의 일요일. 평소와 같이 교회를 갔더니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나를 뜬금없이 점심에 초대를 하신단다. 혼자 밥 먹는 것에 큰 불편함을 느끼진 않지만 결국 그분을 따라 나섰다. 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중산층 거주 지역의 2층 집이었다. 나는 문득 "아~ 오늘 드디어 그 유명한 홈메이드 Sunday Roast를 먹겠구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가 깨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큰 접시에 담긴 음식은 바로 쌀과 닭가슴살 소스... 즉, 커리였다. 그 흔한 샐러드도 없다. 드디어 내가 영국인의 집밥, 커리를 먹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접시 옆의 머그 컵에는 주스도 아닌 스쿼시가 담겨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커리를 자주 드시냐고. 중국 음식 같은 것은 안 드시냐고. 대답은 간단했다.
응. 우리는 주로 이렇게 집에서 먹어."
그 선생님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영국인들도 쌀밥을 먹는다. 생각해 보니 박사과정 연구실의 영국 여학생 도시락 메뉴도 커리였다. 기독교 학생회에서 하는 요리 페스티벌에서 영국 학생들이 해오는 음식도 커리였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만찬에 초대해 주셨던 영국 목사님 댁의 음식 역시 커리였다. 심지어 커리는 음식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커리는 영국에 있는 중국 및 태국 음식점의 필수이자 인기 메뉴로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나는 그곳에서 커리를 결코 먹지 않았다. 한국 사람 그 누가 중국 음식점에서 커리를 먹으려고 할까?
물론 내가 커리를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인도 음식점에서 종종 먹던 커리는 맛이 꽤 좋았다. 진짜 인도 음식을 먹는 기분까지 들었으니까. 낯선 향신료는 도전적이지만 그래도 도전할 가치가 있을 정도이다. 원래 인도의 맛이 그럴 것이라고 믿으니까. 그러나 내가 학교 식당이나 그 외 장소에서 접한 커리를 좋아해 본 적은 단연코 없다. 영국인들의 국민음식이 되었다지만 아직도 내 머리 속의 커리는 영국인들의 음식이 아닌 것이다.
에일 맥주를 마시며 가끔 나도 이젠 영국화가 되었나라고 생각하지만, 커리는 나의 영국화를 막는 큰 장애물인 듯하다.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초대받아서 먹었던 커리가 내 입맛을 실망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무지 친해지질 않는다. 그저 맨밥 위에 얹는 소스일 뿐인데 나와 영국의 커리와 여전히 소원하다.
이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유난히 영국 커리를 먹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내 개인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다.
내게 있어 커리는 아직도 수련회에서나 먹는
그 정도의 음식이란 이미지일 뿐이다.
전에 한 영국인 친구가 "영국 음식 중에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서 보기를 주더라. 피쉬앤칩스, 커리.. 역시 영국인에게 커리는 그들이 사랑하는 음식임에 틀림이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