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워킹홀리데이
운이 좋게도 스페인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출근길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나를 채용한 학원은 발렌시아 도시 내에 지점이 두 개가 있고 회사나 다른 업체에서 영어 수업을 신청하면 선생님을 파견시키는 에이전시 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 학원 수업만을 맡았지만 이후에는 발렌시아 도시 내에 있는 회사와 외곽에 있는 회사에도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문제는 외곽에 있는 회사의 영어 수업이었다.
외곽이라 버스를 타기가 애매했고 한 시간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시간 전부터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학원 매니저인 랍은 나에게 수업 한 시간 전인 12시 55분까지 어느 카페 앞에서 만나자고 신신당부를 했다. 첫 수업은 혹시 지각할까 두려워 두 시간 전부터 카페에 가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문조차 서툴렀는데 다행히도 친절한 웨이터가 내 자리까지 와서 주문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주문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가 직접 카운터까지 가서 주문해도 괜찮지만 일반적으로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웨이터가 주문을 받는 시스템이다.
"pan con tomate y zumo de naranja por favor. 판콘 토마테랑 오렌지 주스요."
스페인어로 주문하기는 어렵지 않다. 먹고 싶은 음식과 개수를 말하고 뒤에 항상 por favor (부탁합니다)를 붙이면 그만이다.
"algo mas? 더 있나요?"
"no gracias. 아니요 고맙습니다"
사실 스페인어를 위해 조금 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하면 못 알아들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선홍색 빛을 띤 판콘 토마테를 입에 배어 물고 싱싱한 오렌지 주스를 마셨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아침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첫 수업이라 긴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들인지 알 수 없고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더 긴장되고 준비를 많이 해갔다.
시간은 12시 55분을 가리키고 나는 가방을 챙겨 카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랍을 만났다.
"Hi Rob, how are you? 잘 지냈어요?"
" I'm good and you? 네 잘 지냈어요"
짧게 인사를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수다쟁이 랍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외국인들은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자신의 이야기를 조잘조잘 잘 늘어놓는다. 주말 내내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미국인 친구 이야기, 누나가 자신의 교통카드를 사줬다는 이야기 등 쉴새가 없었다. 이윽고 우리가 타야 하는 151번 버스가 도착했다. 유럽의 좋은 이미지 때문일까, 질서를 잘 지킬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전혀 틀렸다. 버스가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버스 앞을 가로막고 무질서로 승차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까 서둘러 가방을 앞으로 메고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도 랍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어느 장단까지 맞춰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은 랍이 하는 말을 모두 귀담아듣고 질문까지 했더니 수다가 끊길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랍의 수다와 함께 버스는 30분쯤 외곽으로 달려 나갔다. 어느덧 회사 단지가 눈에 들어왔고 랍은 이제 내려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는 한 정거장을 더 가면 Sam이라는 선생님이 있는데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오토바이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랍이 말하기를 그 회사는 버스 정류장에서는 멀어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걸어갈 수도 있는데 걸어가는 길은 너무 위험하고 20분이나 걸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랍은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랍이 말한 대로 한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Hi, Are you Sam?"
그의 이름은 쌤, 이름답게 직업도 영어 선생님이다. 영국 북부 출신이라 영어 발음을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다. 찬 바람을 가르며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가 수업하게 된 회사에 도착했다. 파란 하늘과 햇살 덕에 나름대로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맞으니 왠지 더 춥게만 느껴졌다.
이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에 맞춰 영어 수업이 진행되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점심시간에 공부라니. 스페인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낮잠(siesta)만 자는 줄 알았더니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도 공부를 했다. 총수업은 3개인데 내가 맡은 반의 수업은 중간 레벨이었다. 다행히도 학생들은 어벙한 나를 이해해주었고 우리의 첫 수업은 자기소개 등 말하기 수업 위주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동양인인 내가 왜 스페인이 왔는지 궁금해했다. 정신없이 첫 수업이 끝나고 쌤과 함께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발렌시아 시내에 도착했다. 쌤은 나를 역에 내려주고 일정이 있어 다시 외곽으로 가야 된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첫 파견 수업을 마쳤다. 험난한 하루였고 다사다난했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