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화 May 18. 2023

드라이브 마이카

진심의 무게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진심과 진실이 불편한 무게를 가지는 때가 있습니다. 밝히는 순간 감당해야 할 것이 생기는 순간들입니다. 그럴 때면 담아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과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지켜지는 것들의 가치가 부딪히고는 합니다.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움에도,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은 순간은 어째서 찾아오는 건지 의문스럽습니다. 

드라이브 마이카는 우리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진심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에 대한 영화입니다.


가후쿠는 연극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호쿠가 연출하는 연극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바로 모두 배역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다름은 소통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저마다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배역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연극의 인물들은 다른 언어를 문제없이 이해하고 소통합니다. 이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소통으로 보입니다. 상대의 언어를 모르는데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니, 납득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가호쿠의 삶에 이런 부자연스러운 소통이 하나 더 존재하는데, 이는 아내 오토와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호쿠와 오토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큰 상실을 겪은 사이입니다. 아이의 죽음은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 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지 않은데, 둘은 함께 이겨내는 것이 아닌 함께 잊어버리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둘의 집에는 아이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난 상실이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가후쿠와 오토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합니다. 비행기의 결항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가 오토의 외도를 목격했을 때도, 후에 오토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을 때에도 가후쿠는 마주하지 않습니다. 마주하는 것이 지금의, 거짓일지언정 행복하게 느껴지는 현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죠. 


가후쿠는 마주하는 대신 하염없이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합니다. 가후쿠에게 드라이브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입니다. 히로시마에서 뜻하지 않게 드라이버를 고용하기 전까지는 오토 이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었죠. 흥미로운 점은 가후쿠의 습관입니다. 가후쿠는 오토의 녹음에 따라 차 안에서 연극의 대사를 연습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가 연기하는 배역은 바냐 아저씨의 바냐입니다. 바냐 아저씨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바냐는 늘 삶을 후회합니다. 바냐가 삶을 후회하는 주된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순수하고 성실한 노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후쿠는 알아주지 않음으로 고통받는 인물의 대사를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알아주려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과 진실을 외면하는 가후쿠의 독립적인 세계는 다카츠키에 의해 침범당합니다. 가후쿠의 세계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맴도는 미사키와는 달리, 다카츠키는 오토의 두려운 진실의 일부분이었을지 모르는 자신에 대한 가후쿠의 경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후쿠는 자신의 차 안, 가장 독립적인 자신의 세계에서 다카츠키에 의해 무력하게 오토의 진실에 다가갑니다. 


다카츠키는 가후쿠는 듣지 못했던, 관계 후에 오토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전해줍니다. 강간미수와 살인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세상에 저항하는 소녀의 마지막은 오토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현재가 주는 고통에 대한 호소 말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덮으려 했지만 이미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그렇게 덮어지고 아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죠. 가후쿠는 오토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그녀의 마음에 심란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아닌 다카츠키에게만 이야기의 마지막을 전해준 까닭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입니다. 


다카츠키의 소동으로 연극이 잠시 중단되었을 때, 미사키의 고향을 함께 찾아가는 가후쿠는 미사키의 과거를 들여다봅니다. 토사물에 덮여 망가져버린 집터에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 미사키를 보며 가후쿠는 처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진심과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자신의 두려움이 낳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주는 고통을 털어놓습니다. 이제야 그녀의 마음을 마주 보고, 그녀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미 이야기할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미사키의 어머니도, 오토도 외면한 과거에만 존재할 뿐 이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둘을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가야 함을 자각합니다. 그것이 남겨진 자의 숙명이니까요.


바냐는 소냐에게 위로받습니다. 언젠가 이 고통이 끝나면 신이 자신들을 굽어살필 것이라고, 그때 받았던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자고 말입니다. 가후쿠는 이제 바냐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가후쿠에게 식사를 대접했던 윤수와 유나는 이미 가후쿠가 알아야만 했던 사실을 간단히 전해주었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으면 수화를 배우면 됩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싶으면 상대가 어떻게 소통하려 하는지 잘 바라보고 그 소통의 방식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죠. 가후쿠는 오토가 어떻게 자신과 소통하려 하는지 바라보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했던 것입니다. 말을 하면 소리를 듣고, 수화를 하면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면 됩니다. 상대의 소통에 집중하고, 상대의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료한 사실을 가후쿠는 너무도 어렵게 깨달아갔던 것입니다.


때로 덮어둔 진심 위로 만들어진 관계가 행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진심을 수면 위로 올리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 위에 세워진 행복입니다. 그런 행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상대조차 영원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 버리고는 합니다. 그렇게 상대를 잃어버린 자리에는 함께 무너진 거짓된 행복의 잔해만이 존재하고, 우리는 뼈저린 고통 속에 그 잔해 속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제는 왜 우리가 때로 고통스러운 진심의 무게를 감당하려 하는가 알 것도 같습니다. 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아프더라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들어야 하는 진심이 있다면 아프더라도 들어야 합니다. 상대의 목소리와 손짓을, 전해오는 진심을 뚜렷하게 마주하며 거짓된 행복의 잔해가 아닌, 진심의 고통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함께 걸어가는 진심의 고통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행복과 안식을 향해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