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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화 May 13. 202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에우리디케의 선택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관한 신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인 에우리디케가 죽자 오르페우스가 저승으로 찾아가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는 해서는 안 되는 단 하나의 행동인 에우리디케가 이승에 완전히 닿기 전 뒤를 돌아봄을 통해 에우리디케를 영영 잃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승으로 다시 떨어진 에우리디케는 비명을 질렀을까요?


영화 속에 언급으로만 등장하는 언니가 있습니다.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질 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사고로 떨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뛰어내린 이유는 원치 않는 결혼 때문이었는데요, 강요되는 운명에 순응해 살았던 어머니와는 달리 그녀는 완고하게 저항했던 것입니다.


언니의 이야기만으로는 에우리디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로이즈가 이야기 한, ‘만약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보라고 이야기했다면?’을 떠올려본다면, 이제는 언니의 모습에서 에우리디케가 떠오르게 되죠. 둘의 모습에서 운명에 대한 저항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쓰였습니다. 저승에 있는 에우리디케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에우리디케는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따랐고, 이제 오르페우스를 따라 이승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녀가 원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죠.


영화 속 시대의 여성들은 에우리디케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야만 하는 삶 말입니다. 누구도 그걸 원하는지 아닌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합리한 시대에 개인이 맞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체로 엘로이즈의 어머니처럼 시대가 강압한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되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저항에 대한 공감마저 잃어버리게 만들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조차 운명에 대한 강요를 휘두릅니다.


마리안느는 두 번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한 번은 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한 번은 엘로이즈를 위해 그립니다. 두 그림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큰 차이가 있는데, 그림에 녹아는 시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머니의 요구를 위해 그린 처음과 달리 새로 그린 초상화를 엘로이즈가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운명을 강압하는 어머니의 시선에 맞춘 것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마리안느 본인의 시선으로 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마리안느에게는 의미 있는 변화인데, 여성 화가가 활동하기 어려운 시대에 그릴 수 있게 허락된 그림과 요구된 그림 만을 그리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시선으로 원하는 것을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의 변화에서 오는 차이를 엘로이즈는 알지만 어머니는 알지 못하는 것은, 그녀는 이미 개인으로써의 여성이 아닌 시대에 일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서입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도망가거나 하지 않고, 그림을 완성한 뒤 그곳을 떠납니다. 시대에 대한 저항에 뒤따를 고통을 함께 감내하기보다는 시대의 억압에 약속된 안락한 삶이 엘로이즈에게 있도록 합니다. 언니의 죽음과 아이를 지우는 소피를 보며 둘은 억압의 시대에 여성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밖에는 달리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내 시대가 정한 운명을 이길 수 없기에, 둘은 죽음을 선택하기보다는 그리워하며 사랑을 간직해 계속되는 저항을 선택한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라고 이야기했다면 다시 저승으로 돌아갈지언정 에우리디케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녀들도 선택을 했습니다. 상대가 곁에 없어도 사랑은 영원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은 그을린 흔적을 남기고, 그을림은 영원한 기억을 새겼습니다. 운명은 안락한 이승으로 끊임없이 그녀들을 이끌 테지만, 그때마다 그녀들은 시대가 내주지 않으려 했던 것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속삭일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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