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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화 May 10. 2023

본즈 앤 올

이해와 사랑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이해를 전제로 하고, 이해는 같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과 그의 갈빗대에서 두 번째 인간이 서로 달랐던 이후로,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태초의 둘 조차 달랐으니 어떻게 우리가 같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 사랑합니다. 서로가 다름으로써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조차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즈 앤 올은 그런 다름과 이해,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식인에 대해 다룹니다. 식인이 기호가 아닌, 본능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죠. 그리고 그들의 아픔은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에 기초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들에 대해 단호하게 경계하고 예방합니다. 우리를 해치는 것이라면 울타리를 쳐 다가오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사냥해 위험을 제거해 버리죠. 그렇기에 식인의 본능을 가진 이터들은 사회의 수면으로 올라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정체를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앞에 놓인 길은 사냥당하거나, 울타리 속에 갇히는 것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들도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식인의 본능 이전에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존재했을 테니까요.


남겨진 아버지의 음성을 따라 매런이 어머니를 찾아 더난 이유도 그런 본능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와 같은 어머니라면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같은 본능을 가졌다고 모두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리와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매런에게는 이터라는 자신의 본능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함께하려 노력했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설리의 삶에는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주거나, 이해하려 노력해 준 기억이 없었습니다. 이터이기 때문에 한평생 혼자 살아야만 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설리는 이해와 사랑의 개념이 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매런에게 이터에 대해 알려주며 잘 대해주려 하지만, 매런은 그에게서 묘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사랑에 대한 결핍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이 오히려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죠. 그렇게 또 혼자가 된 설리에게는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그동안 먹은 사람들의 머리카락만이 함께 있을 뿐이었습니다.


설리와는 달리 매런이 리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리도 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죽였던 아픈 과거가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걱정하고 생각해 주는 여동생이 있었죠. 이해와 사랑이 무엇인가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이터라는 같은 본능을 이해할 수 있었고, 살아온 다른 인생을 이해하며 나아가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런은 리를 만나고 더욱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터인 리를 사랑하고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마침내 만난 어머니는 이터임에도 같지 않았습니다. 같은 이터이기에 서로의 본능을 이해하고, 숨기지 않아도 괜찮았던 매런과 리와는 달리,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터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식인이라는 본능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어머니의 선택은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써 이해받고 사랑받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식인이라는 자신의 본능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식인으로 자신의 두 손을 먹어치운 것이죠. 더 이상 누구도 두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잡을 수 없기에 먹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잡을 수 없기에 더는 누군가를 안을 수도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딸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겁을 줘 쫓아내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딸에게도 전해졌을, 자신의 인생을 망친 본능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식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그렇다고 딸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저 겁을 줘 자신을 더 찾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매런이 설리도, 어머니도 아닌 리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이터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둘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려 했던 경험이 있고, 이 경험을 통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이고요. 같은 본능을 가진 이터라는 사실은 결국  사랑하기에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영화가 끝을 향해 다다를 때, 죽어가는 리는 매런이 자신을 뼈까지 다 먹어주기를 바랍니다. 이터인 둘에게 뼈까지 다 먹어버리는 것은 완전한 이해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죠. 이대로 죽어가느니,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상대에게 먹혀 상대와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의 갈비뼈를 떼어내어 두 번째 인간을 만들었던 행위를 역행하여, 상대의 뼈까지 먹어 하나로 향해간 것입니다.


리를 뼈까지 먹는 매런을 보며 저는 둘의 사랑이 아름다우면서도 부러웠습니다. 동시에 무척 슬펐습니다. 매런과 리에게 식인은 삶의 방식에 그친 것이었습니다. 둘이 사랑하고 함께한 것은 결국 식인 때문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려 하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다름이라는 운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과연 저는 둘처럼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요? 또 누군가를 그렇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식인은 여전히 섬뜩한 말입니다. 그러나 나를 뼈까지 먹어달라는 말은 이제 사랑에 대한 말로 전해집니다. 우리의 삶에 그렇게 나의 존재라는 덩어리를 통째로 마음에 삼켜줄 누군가라는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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