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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화 Jun 03. 2023

헤어질 결심

밀물 같은 아픔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양치기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모두 잘 아실 겁니다. 계속 늑대가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다 보면 정말 늑대가 나타나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어릴 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마냥 양치기 소년이 바보 같았습니다. 왜 거짓말을 해서 그런 사달을 내나 싶었죠. 양치기 소년 이야기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교훈을 주는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생각해 보니, 편견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치기 소년의 반복된 행동이 그를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만드는 편견을 사람들에게 심어준 것이죠. 정말 늑대가 나타났을 때 아무도 양치기 소년을 믿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한 번 자리 잡은 편견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심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죠.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니, 계속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한 소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왜 소년은 계속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는 왜 계속해서 그런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요.


서래는 양치기 소년 같습니다. 그것도 이미 몇 번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 말입니다. 그녀의 말은 어딘가 그대로 믿기 어렵고, 그녀의 표정과 행동, 그녀가 주는 분위기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어떤 거짓도 말하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반면에 해준은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하면 달려와주는 마을 사람 같습니다. 마을 사람에게는 늑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듯이, 형사인 해준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대한 사실 말입니다. 그는 분명하지 않은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서래를 경계하고, 서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때로 주의하고 경계하는 것이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들 때도 있죠. 너무 무엇에 집착하면 사람은 작은 시야를 가지게 되니 말입니다.


해준은 분명함을 찾아 몸부림치고, 해준의 몸부림은 점점 더 그를 흐릿하고 모호하게 만듭니다. 영화 내내 드리우는 안개는 그런 해준의 시야에 대한 비유 같습니다. 형사로써 해준은 사실을 쫓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안개에 휩싸인 그를 보고 있으면 사람으로서 해준도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해준이 그랬듯, 때로 누군가를 대할 때 우리는 사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정의 내리고, 판단하고 때로 저울질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더 잘 알기 위해, 그 사람과 더 잘 지내기 위해서와 같은 이유를 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 말로가 때로 무참히도 비극적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에 집착하는 행동은 경계해야 하는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서래는 사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해준의 미제 사건으로 남고 싶다는 서래의 말은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더 집착하지 말고, 정의 내리려 하지 말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두기 위해 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정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서래는 알고 있던 것이죠. 


서래가 살인을 저질렀는 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것보다 해준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그녀가 어떤 사람이길 바라는 가를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해준에게 서래가 죽일만한 사람이었다면 서래는 누군가를 죽일만한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해준에게 그녀가 결코 죽이지 않았을 사람이라면 서래는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인 것이죠. 그러나 해준은 서래의 말과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끝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느꼈는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안갯속에서 헤매고 맙니다.


모래를 파고 들어가 웅크린 서래의 모습은 슬픕니다. 웅크린 서래는 해준이 만든 편견이라는 파도가 밀어내는 모래 속에 서서히 잠겨 사라집니다. 서래의 마지막은 편견이 만들어낸 죽음입니다. 뒤늦은 해준은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만든 편견이라는 파도는 몰아치지 않고 서서히 찾아올지언정, 쌓이고 쌓여 해안을 바다로 만드는 밀물이 되었고, 해준은 그 어떤 흔적도 쥐지 못한 채 헤맬 뿐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편견이 죽인 소년 말입니다. 그는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늑대를 이야기했을까요? 어째서 반복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들판의 외로운 소년에게 마을의 어느 누구도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일까요. 계속해서 늑대의 존재를 소리치는 소년은 어쩌면 훗날 찾아올 편견이 자신을 죽이는 날을 준비하며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바라바주고, 들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너무 마음에 두는 일이 그 사람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탐구하는 욕심으로 변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에 빠져 눈과 귀를 막은 채 파해치는 그곳에는 어떤 값진 사실도 묻혀있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서서히 차올라 모두를 잡아먹는 밀물 같은 아픔만이 기다릴지도 모르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편견으로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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