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2
햇살에 잠을 깼다.
어제 꽤 많이 마셨다. 숙소에 들어오는데 옆집 도어락을 누르며 왜 비밀번호가 안맞지 했던 게 불현듯 기억났다. 누군가 나 때문에 놀랐겠구나. 아침에 해뜨는 걸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것도 잠시, 가까스로 사진 한 두 컷을 찍고 다시 기절했다. 결국에는 체크아웃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아 일어났다.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 말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햇살은 얇은 유리 한 장만을 거쳐 내 몸에 닿았다. 사우나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원기회복에 도움이 된 것 같다. <Dancing With My Phone>을 반복재생하며 천천히 샤워를 했다. 찬물로 씻었는데도 몸에서 열이 났다. 내친 김에 스트레칭과 스쿼트 100개를 했다.
최대한 숙소를 깨끗이 하고 길을 나섰다. 숙소 바로 옆에 지난 7월에 개장한 복합문화시설이 있었다. 밀락더마켓이라는 공간이었는데 더베이101을 만들었던 분이 기획한 공간이라 들었다. 1층은 주차공간, 2층은 음식점, 카페, 쇼핑시설이 밀집해있었다. 빨간 벽돌로 포인트를 주고 넓은 공간감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끌었던 건 과일낙원이라는 카페였다. 그 중에서도 귤파주스라는 메뉴가 블랙보드에 적혀있었다. 설마 귤이랑 파인가 했는데, 알고보니 파인애플이었다. 시럽을 빼달라고 부탁 드렸다가 사장님처럼 보이는 분께서 수제 청이 있는데 넣어드릴까요,라고 거듭 물으셔서 추천하시는대로 먹어보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 자칫하면 시큼할 수 있는 두 재료의 시너지를 수제 청이 잡아주는 느낌이었다. 5분도 안되어 흡입해버렸다. 다만 다회용기에 달라고 할걸.
미팅 시간까지는 1시간 반 조금 넘게 남아있었다. 밀락더마켓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주 출입구에 들어서면 중간에 길이 크게 나 있고, 마치 쇠창살의 구조처럼 상가가 이어져있었다. 가장 왼쪽부터 가장 오른쪽까지 6개의 살이 있는 셈이었다. 각 살에는 4개의 상가가 배열되어 있었다. 평일 점심 시간 조금 전이라 한적하지, 주말이거나 평일 저녁이었으면 분명 사람이 꽤 많이 몰릴 듯 했다. 저 멀리 창이 넓게 뚫려있어 채광이 좋았다. 랍스터를 1인분으로 파는 곳도, 연포탕을 파는 곳도 있어 순간 혹했지만 원래 생각했던 돼지국밥집으로 가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가방이 꽤 무거웠다. 읽지도 않을 책을 두 권이나 챙긴게 문제였다. 가방 자체가 무거워서 그런가. 수련한다는 기분으로 걸었다. 더워서 목폴라를 고이 개어 가방에 넣고 반팔에 코트를 손에 들었다. 봄 날씨였다. 정박된 배를 지나고 지나다 보니 민락 수변공원이 보였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인연이 생겨나고 흩어졌을까. 국밥집에 도착했을 때 대기 팀은 40개였다. 이걸 언제 기다리나 했는데, 일단 들어가봤더니 혼자 오셨으면 바로 식사할 수 있단다. 그래 난 팀이 아니지. 음하하. 고기국밥을 시켜서 10분간의 황홀경에 빠졌다. 돼지고기가 꽤 많이 들어가있었다. 마늘, 양파, 고추, 배추김치, 부추 등 나온 반찬은 싹 다 먹었다.
먹고 나오니까 미팅까지 시간은 48분. 시간이 조금 있었다. 운동하고 싶었다. 바로 옆에 있는 어린이공원에서 대충 높이가 맞는 봉을 찾았다. 약간 뛰어야 잡히는 아주 굵은 봉이었다. 하늘을 보면서 턱걸이를 하는 건 멋진 일이다. 10개, 10개, 8개, 7개, 5개, 5개. 이런 식으로 70개를 하고 택시를 불렀다. 나머지 30개는 집에가서 하면된다.
미팅은 한 시간이나 이어졌으나 핵심은 하나였다. 돈 내놔라. 회사 내 누구도 대체할 수 있는 내 역할은 예산 소요를 방어하는 그것이었다. 회장님 일정에 대해서는 비서실에 확인해보겠다 정도였다. 전시장, 호텔 동선을 보고 얘기를 끝마치니 시간은 이미 4시. 부산역으로 향했다.
5시 24분 부산역 근처 횟집에서 B를 만났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나는 본인의 이름을 얘기하며 들어오는 B의 목소리를 들었다. B가 빼꼼하고 고개를 커튼 사이로 내밀었다. 얼굴이 훤했다. 부산이 좋긴 한가보다.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였지. 부산 발령 나기 전이니까, 11월 중순쯤이었을 거다. 헤어지면서 아쉬워했는데 이렇게도 금방 보게될 줄이야. 출장이 많은 새 부서로 온 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서로 일 얘기를 했다. 부산은 꽤나 평화로운 듯 했다. 동료 두 명이 사소한 트러블이 있는 것 외에는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륙도 근처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부모님이 근처에 사셔도 식사도 자주 같이한단다. 서울보다 많은 부분 집적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업무 스트레스가 크지 않아서 좋아보였다. 결혼한 M과 떨어져 사는 게 마음 아프고 요즘도 헤어질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지만 막상 혼자 있어도 잘 지낼 그녀다. 나는 현재 배치된 부서에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출장이 있어 B를 볼 수 있어 나쁘지 않다는 것과 여태해온 업무와 결이 크게 다르지 않아 적응이 어렵진 않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요즘 뭘하고 사느냐는 얘기에 며칠 전 생일에 S와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것, 예민하게 살아간다는 것, 취향을 발전시키지 않아야할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다른 부분에서 다 끄덕이더니 B는 취향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15만원짜리 코스요리가 10만원짜리 코스요리보다 꼭 맛있는 게 아니듯, 더 접근성이 낮은 취향이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보다 우월하지는 않다는 의견이었다. 한 마디로 취향의 전개는 비선형적이라는 것.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지 싶을 정도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취향에 대해서 가졌던 방어적인 태도가 무언가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은 직감하고 있었는데 B로 인해 뚜렷한 방향성이 생긴 느낌이었다.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도 했다. B는 도시인의 월든이라는 에세이가 꽤 괜찮았나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숲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쓴 글 인가보다. 얼추 들어보니 내게도 꽤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나는 다시 장강명을 추천했다. 재수사도 좋지만 아직 표백을 읽지 않았다면 표백부터. 형이상학적인 미녀가 나오는 소설이라며. 더워서 폴라티를 벗었더니 에곤쉴레 자화상 티셔츠가 나오자 B는 빵터졌다. 이것보다 더 너일 수 있냐며. 마치 “이게 나야.”라는 걸 주장하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단다. 생각해보니 오늘 미팅 전 수변공원에서 바다를 보며 이 티를 입고 턱걸이를 하는 건 정말 내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B는 다시 나를 하루키 소설 주인공에 빗댔다.
또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창업 이야기도 잠깐 했다. B는 플랫폼에 있어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매번 참 어려운 질문이다. 어쨌든 서비스의 목적은 누구나 쉽고, 안전하게 경매를 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이다. 그 목적에 걸맞게 사용자 관점에서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해왔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서비스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걸 물어보길래, 나는 B에게 경매를 할 때 뭐가 제일 중요한 것 같은지를 물어봤다. 결국 권리분석과 수익률 분석이었다. 그 두 가지를 하는 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가격이 평수별로 규격화된 아파트에 한해서 낙찰가 대비 수익률을 분석하는 것과 경매과 급매를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공동 창업자 셋 중 한 명만 실제 낙찰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점이 플랫폼을 만들어나감에 있어 큰 한계점으로 여겨져서 경매 관련 콘텐츠를 기획하고 출연한 얘기해도 했다. 회사 사람 중에서는 처음으로 얘기했다.
전 연인과 헤어졌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 놀랍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다들 똑같은 반응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라고 물어봤을 때 내 대답은 끌리면서, 성숙한 사람으로 수렴했다. 조금 더 많이 바라자면, 끌리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다. 몸은 운동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 마음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람이다. 교집합이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B는 인스타그램도 글쓰기에 포함이 되냐는 의견을 제시해왔는데,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볼 확률은 더욱더 희박해보인다며 우린 웃었다. 육체만 있지만 정신이 없는 상징과, 정신은 있지만 육체는 없는 상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양 극단은 설정되었고 이제 내가 할 일은 중간을 찾는 것 뿐이다. 얼마나 쉬운 일인가.
내가 자주 생각하는 또 다른 강령,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 말을 듣더니 B는 너 공직자해도 잘했겠다며 감탄했다. 새삼 내게 멋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멋있을려고 노력하다 보니 조금 멋이라는 게 생기기는 한걸까. 업무에 있어서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기는 정말이지 어렵다. 이를 위해서, 타인의 목적 또한 맡게된 임무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그 임무를 잘 할 수 있도록 내가 업무 지시하는 것 또한 그들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었음을 고백했다. 이 강령은 헌팅에도 적용이 된다. 골자는 지속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 스스로를 수단화한다는 거였다. 그런 사람과 살을 섞는 것은 스스로를 쾌락을 느끼는 객체로 전락시킨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그런 이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공허할 뿐이다. B도 결국엔 외로워서 한 섹스가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들뿐이라는 말을 했다. 근데 이 시점에서 L이 한 말이 생각이 난다. 활발한 성생활을 즐기는 L에게 나는 나도 너처럼 하고 살아야하는데 선비 기질을 버리질 못 하겠다, 라고 했더니 L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너도 속은 백정이야. 맞다. 나도 여자를 참 좋아한다. 독백처럼 한 말을 주워들은 B는 빵터졌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를 어찌 그리 잘하냐며. 외로움을 견디질 못 하는거지. 계속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은거다.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저번 연애로부터 가장 크게 느낀 점이다. 나는 숲을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은 계속 나무를 이야기하면 정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B도 고개를 끄덕이며, 너처럼 세계관이 확실한 애는, 다른 세계관이 확실한 사람을 만나서 그 차이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껴야한다는 말을 했다. B의 말은 매번 버릴 게 별로 없다.
B와 함께 있으면 내가 평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나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나오곤 한다. 신기하다. B와의 대화는 진정으로 즐겁다. 식당이 꽤 시끄러워져 우리는 부산역 바로 앞 전통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통 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공간이었다. 주인장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깊었다. 나는 그걸 또 면전에다 대고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M과 나의 결이 참 비슷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건 덤이다. 그래서 B와 내가 더 잘 맞는 건지도 모른다. 거의 닫을 시간이 된 찻집에는 우리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건, 옛사랑의 피아노 연주 버전이 흘러나왔다. 계속 있고 싶은 공간이었다. 앞으로 부산을 오게되면 자주 찾게될 것만 같았다. B랑 나는 누가 먼저 얘기할 것도 없이 이 공간을 골랐다. 케이크를 고를 때도 주저없이 초코가 아닌 호두를 골랐다. 참 죽이 잘 맞는다.
B는 역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그러면서 비즈니스가 잘 되면 더 끝까지 해볼 생각인지를 물었다. 나는 그 선택을 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이걸 시작했다고 얘기했다. 그건 그 때 가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기차까지 오려는 B에게 이젠 집에 가도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했다. 하지만 B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기차를 태워보냈고, 자리에 앉은 나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었다. 새로운 부서를 오게되면서 심란해졌던 마음이 덕분에 많이 다독여졌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 밤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