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르조 Jan 22. 2023

친구에게 그림을 선물했다

230114

그림 쇼핑을 끝내고 C와 함께 앉아 글을 쓰고 있다.


C를 만난 건 2007년 10월의 어느 날이다. 나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다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전학을 왔다. 내가 오고 난 후 2주 뒤쯤 C가 우리 학교로 전학 왔다. 같은 반도 아닌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는 농구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강아지가 주인을 찾듯 운동장에 있는 농구코트를 찾았다. 거기서 어설프게 슛을 던지고 있는 C를 발견했다. 그다지 공을 잘 다루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은 많은 스타일이었다. 사실 나도 당시에는 발목 염좌가 있어 슛만 살포시 던지면서 C의 슛폼을 놀렸으니, 우린 둘 다 입으로 농구하면서 처음 만난 셈이다.

시간이 흘러 2023년이 되었다. 우리 우정도 16년 차다.

입사한 지 5년 즈음이 되어간 우리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남의 일을 대신하지 않고 뭔가 내 것을 만들고 싶다는 그 타는 목마름말이다. 나는 입사 전에 잠깐이나마 창업을 경험했고 C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개발자였으니 우리는 나름 훌륭한 조합이었던 셈이다. 우리동네 위스키 가격 비교 플랫폼, 와인 바 등 꽤 많은 비즈니스를 얘기했다. 결국 우리가 정착한 건 경매 플랫폼이었다. 시작하게 된 계기도 꽤 신기하다. 작년 여름 간만에 서울숲에서 대학교 선배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친하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서로 고향이 멀지 않아 만날 때마다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하는 D와 얘기를 하는데, 그녀는 개발자를 찾고 있었다. 경매 플랫폼을 만들어보고 싶은데 경매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개발자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고민이었다. C는 작년 초에 상가를 낙찰받고 얼마 전에 시세 차익까지 봤다. 뭔가 재밌겠다 싶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C에서 전화를 걸어 셋이 함께 보는 미팅을 잡았다. 우리는 이제 같이 일한 지 4개월 차가 되어간다.


16년간 C랑 친구를 하면서 우리는 기억에 나는 선물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D가 우리에게 작년에는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이번에는 내 생일 선물까지 따로 챙겨줬다. D의 마음이 고마웠다.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동업자를 넘어 서로의 꿈을 가장 가까이서 응원하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던 터였다. 별 수 없이 선물의 ㅅ도 모르는 남자 둘이서 함께 뭘 줘야 할지 고민했다. D가 필라테스를 하니까 운동복, 애플 세계관에 빠져있으니 에어팟 프로와 같은 아주 1차원적인 아이디어가 오갔다. 그러다 갑자기 샤워하는 중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이 났다. 그림.

우리가 오늘 만난 목적이 바로 이 그림을 한 번 보고 고르기 위해서다. 둘 다 추상미술에 문외한인 걸 말하기도 입이 아프지만, 패션을 전공하기도 하고 평소에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D에게 그림만 한 선물이 없을 것 같았다. 유명 작품의 모작을 사볼까 하다가 이왕이면 한국 작가의 조그만 작품이라도 오리지널 작품이 나을 것 같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이 정말 맞는지 C의 친구의 여자친구의 친구 중에서 장예지 작가라는 분이 있었다. 갈수록 무언가를 찾을 때 지인의 소개로 찾는 경우가 많아진다. 새삼 내가 아는 사람들과, 그들이 아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거구나 싶었다. 비 오는 토요일 오후에 그분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숲에 있는 조그만 갤러리로 우리는 향했다.

갤러리는 크지 않았다. 원룸 정도 사이즈에, 장예지 작가의 작품이 벽에 대여섯 개 걸려있었다. 대부분 기하학적 도형이 요리조리 배치되어 있는 추상적인 그림들이었다. 타원, 직사각형이 빚어내는 어떤 정형화된 차가움과 배경의 따뜻한 색깔들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초록색, 파란색과 같은 따뜻하지 않은 색도 많이 보였는데, 차가운 색상의 채도가 낮은 탓인지 따뜻한 색이 조금씩 섞여 있어서인지 전반적인 느낌은 안온하고 편안했다. 고민을 조금 하다가 원래 우리가 생각했던 작품으로 사기로 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대표님과 그림의 가치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이 그림에 어떻게 200,000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되는 건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나와 C의 인생 첫 구매 그림의 이름은 <Farming series_23>였다. 마음이 편해지는 초록 계열의 도형이 서로에게 포개어져 있는 작품이었다. 추상미술의 제목에 숫자가 붙는 건 추상성에 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갤러리를 나왔다.


우리는 뚝섬역 근처의 카페로 왔다. 앉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나나 C나 생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고민을 축약한다면 결국 그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일 테다. 내가 가져온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C가, C가 가져온 <덕업일치 가이드북>을 내가 읽었다. 전자는 개인의 내면에 수렴하는 책이라면, 후자는 당장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게 만드는 발산하는 책이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방금 “To be or not to be"라고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카페가 나무와 코르크로 꾸며져 있어서 포근한 느낌을 자아냈는데, 인테리어와 재즈가 잘 버무려져 뭔가를 작업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다. 우리는 지금 각자 노트북을 통해 글을 쓰고 있다. C가 최근에 읽은 역행자라는 책을 읽다가, 그 책에서 권한 자신의 원하는 걸 얻는 방법 중에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각자 30분의 시간 동안 글을 써보자고 했다. 잠시 주저하던 C는 이내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간이 다되었다. C는 어떤 글을 썼을까.

서로 글을 바꿔 읽었다. C의 글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짧은 에세이였다. 글을 통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무거움이 있다.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말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감안하게 된다. 그로 인해 본인의 이야기에 철저하게 솔직해지기에는 많은 저항이 걸린다. 원래 고민이 많은 친구란 건 알았지만 짧게나마 시간을 내 쓴 글을 통해서 C가 고민하는 삶의 방향성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나도 덩달아 내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하고 또 쓰고 싶어졌다. 써야 한다 꾸준히. 같이 생을 써내려 가보자꾸나 친구야.

작가의 이전글 출장지에서 친구를 만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