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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Feb 19. 2023

두 번째 자의식 해체: 다 할 수 있다

230219

나는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운동, 일, 사이드잡, 관계, 글쓰기 등 내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왔다. 대학 때도 새내기 시절에는 적응하느라 어버버 하지 않나. 2년 차 여름부터 쯤부터 업무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업무 외적인 삶을 고민했다. 이젠 삶의 큰 축이 되어버린 운동과 글쓰기를 꾸준히 하기로 스스로와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지켜내면서 자신감이 눈덩이 마냥 지속적으로 붙어왔다.


"다 할 수 있다.", "그냥 해라."가 뇌를 장악하면서 그 단순함에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 삶이 꼭 뜻대로 되지 않음을, 사람마다 상황, 성향과 그에 따른 의지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부러 무시해 온 건 아닐까. 내가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의 성장이 선형적일 수 없음에도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러닝 한 코스를 뛸 때마다 내가 이룬 단위 성취에 지나치게 취해 있지는 않았나. 혹시 성취가 자의식을 비대하게 만들어 오만해지지는 않았나. 힘이 바닥난 상대 앞에서 스스로에 취해 "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다. 나의 직선적인 언사가 상대의 숨을 막히게 한 적은 없었나.


어제 오후에 J와 통화를 했다.

"<역행자> 읽어봤냐? 좋더라."

"그 책 지나가면서 잠깐 봤는데, 자기가 겪은 어려움은 다 생략하고 자기가 이뤄낸 것들 자랑하는 전형적인 자기계발서 같던데. 난 그런 책 보면 사기꾼 같아서 일단 의심부터 들더라."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근데 나는 요즘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나한테는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우리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자. 니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나는 일도 해야 되고 애도 봐야 하는데 하고 싶은 걸 언제 하냐. 이제 곧 박사 가면 더 시간 없을 텐데."

"그래도 그냥 하면 되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뭐든지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럼 애 보고 일도 하고 뭘 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그래 그러면 되지."


마지막 말을 뱉고 이게 정말 내가 한 말인가 싶었다. 내가 요즘 뭐가 씌었나 보다, 의지가 불타올라서 계속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된다고 솔직하게 J에게 이야기했다. 친구는 사람마다 그런 시기가 있는 거지,라면서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거칠게 이해하자면 "전체와 부분은 서로서로 연관 짓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정도로 풀 수 있겠다. 삶에 매번 주저하고 고민만 하던 과거의 나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의 나도 모두 나라는 어떤 통합적 이해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했다. 정반합이 떠올라서 민희진의 인터뷰도 잠시 언급했다. 티비만 틀면 청순함을 컨셉으로 한 걸그룹이 나올 때 '걸크러시'를 표방한 2NE1이 혜성처럼 나타나 음원차트를 재패한 사례 말이다. J는 유행이 돌고 돈다는 걸 철학적으로 풀어냈다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민희진은 뉴진스라는 상품을 출시함과 거의 동시에 세상에 걸어 나왔다. 두 건의 서면 인터뷰, 유퀴즈 출연을 통해서 그녀는 스스로를 아이돌 산업에서 가장 유능한 전략가로 브랜딩했다. "제가 손 대면 다 성공했어요."라는 그녀의 말은 곧 6개 계열사를 통해 30대 초반에 월 순수익 1억 원의 현금 흐름을 창출했다는 <역행자>의 저자의 말이다. 한 치의 실패도 허용하지 않는 매끈한 도화지 같은 성공 신화다. 사람은 서사를 원하고 서사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J는 <제텔카스텐>이라는 책을 추천했다. 주제를 잡고 논문이든 에세이든 뭔가를 쓸 때,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으려 하는데 오히려 다른 근거들만 나와서 본문을 채우는데 애를 먹은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러다 결국 주제를 뒤엎고 새로 쓰게 된 경험이 허다했다. J가 설명한 "제텔카스텐"을 내 식대로 풀어보자면 결국 "상향식 글쓰기"다. 여기서 우리는 주제를 먼저 잡는 게 아니라 근거를 먼저 수집한다. 구체적으로 하루에 6개에 메모를 쓰고 메모에 2-3개 정도 키워드를 태그 한다. 열흘이 지났을 때 당신에겐 60개 메모와 120-180개의 태그값이 있을 것이다. 중복되는 태그값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태그값이 50개로 1순위고 "변증법"이라는 태그값이 40개로 2순위라면 우리는 그 둘을 엮어서 "변증법으로 해석학적 순환 이해하기"와 같은 주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 글을 막상 쓰려할 때, 에세이의 속을 채울 수 있는 근거는 최소 90개의 메모 속에 충분히 있다. 사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통화 내용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내용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어떤 취지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제텔카스텐을 요즘 나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어떤 태그값이 도출될까? "경매", "수익화", "정반합",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정도가 있겠다. 10년 전의 나는 대학교 2학년이다. 그때의 태그값은? 아마 "사랑", "연애", "관계", "군대"였을 것이다. 10년 뒤의 나는? 이대로 간다면 "아내", "사업", "투자"일 것 같다. 모두 다 나다. 우리가 입는 청바지의 통이 넓어졌다 줄어들듯이 나의 관심사도 "사랑"과 "일"을 계속해서 순환할 것이다. 지금 내가 다소 강하게 뭔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도, 이루고 싶어하는 것도 내 삶의 한 과정이고 부분이다.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나오는 깊은 산속을 키가 큰 나무 사이사이로 헤매다 햇살이 내리쬐는 평평한 공터에 이른 느낌이다. 마음껏 의지대로 행동하자. 다만, 듣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의지를 타인에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질문하고 상대가 할 말을 듣는 것이다. 팔로알토가 노래했듯 급하게 가지 말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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