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7
한국이 싫었다.
싫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물질 만능주의, 집단주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교육 시스템, 입시 경쟁과 경쟁 신화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 빈약한 역사의식. 남들도 다 겪는 한국이라는 사회의 모순이 친구들에 비해 날카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뉴질랜드 유학 경험이다. 막 자아가 확장을 시작할 무렵 뉴질랜드에서 2년 반 동안 개인의 자유, 비판적 사고를 배웠다. 유학을 마치고 전학을 간 대구의 중학교에서는 이런 가치가 설 자리가 없었다. 두발 규정, 체벌은 신체의 자유를 억압했다. 사실상 대학 입시를 위해 설계된 한국의 중등교육과정이라는 시스템 아래서 교사는 사유가 아닌 지식만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따라가기 바빴으며 수업 시간마다 이상한 질문을 해대는 나는 진도나 늦추는 놈이었다.
개인적인 기질도 한몫했다. 이해가 어려운 현실 앞에서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게 현실인 걸.”하고 납득해 내는 사람과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 나는 후자였다. 한국 사회에, 특히 대구라는 커뮤니티에 비판적인 아버지도 이런 나의 불온한 생각에 힘을 줬다. 그때 아버지의 생각이 정확히 어떠했는진 모르지만 아마도 위에 열거한 내가 한국이 싫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당신께서 책을 좋아하셔서 집 곳곳에서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과 같은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국사 시간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다가 한 대 맞고 이해가 되지도 않는 <대한민국사>를 달달 외워가 선생님에게 반론이랍시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이야기했다가 두들겨 맞고 돌아온 적도 있다. 17년이 지난 일인데도 아직도 선명하다.
중학생의 나는 분명 지금쯤 해외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한국이다. 서초 반포구립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엎드려서 일차함수와 원의 접선 문제를 풀고 있는 중학생 맞은편에 앉아 노트에 끄적이고 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짓는 아이의 필통에는 ‘하쿠나 마타타’가 쓰여있다.
나는 한국에 살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24살 한껏 기대를 품었던 네덜란드 교환학생으로서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 있었다. 20대 중반이 되어서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그것도 외국에서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꽤 오랫동안 품어왔던 국제기구의 꿈이 사라진 것도 컸다. 6주간 일했던 국제기구에서의 업무는 내게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뼈저리게 알려줬다.
벌써 한국에서 5년 차 직장인이 된 나는 우리 사회의 모순에 꽤 적응했다. 한국 사회에만 있는 모순도 아니며 모순이 없는 사회가 어디 있겠냐는 썩 보편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의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는 뿌리가 깊어서 계기가 있을 때마다 대화로든 행동으로든 삐져나오곤 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는 내가 그럴 때마다 또 쓸데없이 한국을 싫어한다며 나를 나무랐다. 한국을 살아가기로 선택했으면서 이런 생각을 계속 가져간다는 게 내게 효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관성대로 살았다. 적당히 적응하고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낄 만큼만 가끔 불평하면서 말이다.
<역행자>라는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사>와는 많이 다른 책이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지침이 주 내용이다. 함께 경매를 공부하는 친구가 처음 얘기했을 때 왠지 모르게 끌렸다. ‘거슬러 행하는 자’라는 뜻의 역행자라는 개념도 생소하지만 뭔가 모르게 나를 지칭하는 것만 같았다.
<역행자>의 뼈대는 일곱 가지 단계의 지침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자의식 해체’다. 한 마디로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생각을 해체하고 재설계하라는 뜻이다. 물이 가득 찬 잔에는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다는 도가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고 보니 <아바타 1>에서도 주인공이 족장을 처음 만났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아무튼 이 단계를 보면서 해체할 만한 생각이 몇 가지 떠올랐다. 그중 첫 번째가 내 정체성을 형성해 온 큰 축, ‘한국이 싫다.’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이 싫은 이유를 하나씩 반박해 보았다. 큰 방향은 우리 사회에만 있는 모순이 아니며 그 반대의 모습을 한 사회가 꼭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냐는 것이다.
- 물질 만능주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인류가 이룩해 온 사회 구조의 최종 업데이트 버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물질을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미국,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가 정착한 지 오래된 선진국에서도 물질 만능주의는 우리처럼 만연하진 않더라도 존재한다. 프랑스, 북유럽과 같이 물질을 과시하는 행위가 천박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이 사람들은 역으로 명품을 걸치고 나가면 사람들이 본인을 이상한 사람 취급할까 봐 일부러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피하기도 한다. 프랑스, 북유럽의 물질에 대한 인식이 꼭 더 발전된 그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고를 해체하려 해 봐도 여전히 물질을 과시하는 행위가 내겐 천박하게 다가온다. 해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개인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해의 범주에 들어온다.
- 집단주의: 개인주의로 축이 움직이고 있다. 1인 가구 증가, 최저 출생률, 이혼율 증가와 같은 지표가 말해준다. MZ 세대론의 부상은 MZ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기성 사회의 합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젠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대상에게 자신의 가치를 설파하는 행위가 너무나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제품, 서비스 심지어 정부 정책에서도 초개인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우리 사회가 그 어떤 사회보다 빨리 변해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생각보다 빨리 개인의 고립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전화기를 들고 동네 정신과 세 군데로 연락해 보라. 가장 빠른 주말 진료는 최소 2주 뒤다.
- 교육 시스템: 전 세계에서 ‘노예’를 양성하지 않는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있을까? 굳이 꼽자면, 북유럽 3개 국가,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정도가 떠오른다. 사회 입장에서 개인은 인적 자원이다. 한국처럼 자원이 희소한 나라에서는 개인에게 자원으로서 기능하라는 압박이 더 강하게 들어온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아이는 여전히 책상에 반쯤 누워서 머리를 한 시간 전과 얼추 비슷한 강도로 부여잡고 있다. 다만 기존의 인적 자원은 주입식 교육으로 양성이 가능했지만 ChatGPT로 대표되는 AI 시대에서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변화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섰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중등교육과정의 유일한 목표는 입시였지만, 학벌 해체의 가속화로 입시의 기대이익이 낮아지면서 교육과정을 이탈하는 개인도 발생하게 된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라는 ‘유튜버’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함께 겪어온 한국 교육은 머지않은 미래에 해체된다.
-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 개인적으로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위만 보고 지난 70년을 달려왔다. 경공업, 중공업, 조선, 반도체, K-POP까지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쓰지 않은 산업이 없다. 이 체제에서 빠르게 따라가지 못하는 개인은 무용하거나 걸림돌이 될 뿐이다. 노인,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여성도 모두 본질적으로 우리 사회의 주요 아젠다가 되지 못해 왔다. 전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전쟁으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외형적인 발전은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산업과 경제에 집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흔히들 교실을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지 않나. 미국이 반장이고 중국이 반장에 맞서는 부반장이라면 거기서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학생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다가 열심히 공부만 해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속도로 성적을 올려낸 학생. 그로 인해서 성격도 어딘가 분열되어 있고 감정 기복도 심해 건강을 돌봐야 하지만 태생이 왜소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직 공부에만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학생이 아닌가 싶다.
조금 더 작은 차원에서도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까지는 한국 사회 자체를 조망하려 했다면 이제는 사회를 조망한다는 방식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구조와 환경의 영향력을 어떻게 무시하겠냐만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삶은 개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최근 2년 반 동안 매일 턱걸이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턱걸이를 추천하고 다녔다. 대부분 눈에 띄게 몸이 달라진 걸 본 상대방이 비결을 묻자 턱걸이라고 대답을 하는 맥락에서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하시네요.”이거나 “저도 한 번 해봐야겠네요.”이다. 나로 인해서 기존에 턱걸이를 하지 않던 사람이 턱걸이를, 매일은 고사하고 그냥 하고라도 있는 사람이 주변에 몇 명이나 되는지 아는가? 0명이다.
가장 안타까운 사례는 오랫동안 일하느라 어딘가가 아프거나, 체력이 안 좋은 편이라 집에만 가면 쓰러진다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문제가 있는데, 왜 행동하지 않을까? 도수치료, 약, 각종 영양제 등 병원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의존하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건 그분들도 분명히 알 텐데 말이다.
운동뿐이랴. 공부, 업무, 투자 등 우리가 해야 한다고 여기는 수많은 과업에 대해서 우리는 대부분 행동하길 꺼린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비교적 짧은 인류의 진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최소한으로 행동하고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하는 데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2023년의 우리는 수렵하고 채집할 때의 선조들과 사뭇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 우린 더 이상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 지를 찾고 그것을 행하면 된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모두의 출발선이 같지 않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한다. 오늘도 반포 도서관에 오는 길에 교대 근처 아파트 집값을 검색했을 때 여전히 이게 진짜일리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행해내야만 한다. 행동해야 한다.
글이 길어졌다. 쓰기 전 나의 목표는 한국 사회와 화해하는 것이었다. 삶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를 그다지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게 여태껏 삶의 효용 총량을 많이 깎아먹었겠다 싶다. 아쉬운 점이 아직 있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화해에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래서 한국이 문제야.”라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바꾸기 어려운 사회보다 바꿀 수 있는 나를 최적화하는 게 삶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 믿는다. 그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궁극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몸과 충만한 정신으로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