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2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 내가 쓰는 업무 메일 마지막에 자동 등록해 둔 문구다.
이지안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어두캄캄한 삶을 하루하루 견뎌내다 한 사람을 만나 자신에게 지워진 굴레를 서서히 벗어던지는 인물이다. 드라마가 도달하고 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이지안이라는 사람이 내게 보여준 삶이 거대하게 다가와서 한동안 그 세계 속에서 살았다. 그녀 이름의 한자를 풀어보면 이를 지(至) 편안할 안(安), 편안함에 이르다는 뜻이다. 편안함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하루하루의 지난함과 고됨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나와 업무로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기원했다.
며칠 전 업무 메일을 쓰고 마지막 줄의 자동 완성된 문구를 보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편안함이 궁극적인 가치가 될 수 있을까?' 가설을 검토하고자 할 때는 가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어떤 극단으로 설정해 보라고 배웠다. 완전히 편안하기만한 시간을 상상해봤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뉴질랜드 와나카 호수 앞 별장에서 요리를 하고 술을 마신다. 낮에는 호수에서 헤엄치고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웃다가 밤이 되면 장작을 태워 불을 만들고 그 주위를 빙그레 둘러싸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함께 별도 본다. 그러다 마운트쿡 트래킹도 가고 퀸스타운에서는 번지점프를, 폭스 빙하에서는 스카이다이빙도 한다. 그런 생활이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이 이어진다. 상상만 해도 평안해진다.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이런 삶일까?
완벽해 보이는 나날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평안함이 계속해서 쌓이다가 어느 순간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날 것이다. 그게 정말이지 뭐가 되었든 말이다.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 스타트업을 창업을 하든, 튀르키예에 봉사를 떠나든, 국내 기업이 해외 바이어를 만나 수출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든, 뉴질랜드 목장에서 소의 젖을 짜는 일이든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게 자명하다. 몸도 벌써 근질근질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삶의 목적을 찾고 목적에 한 걸음씩 가까워져 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자 한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각자의 무언가에 우리는 생명력을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들이붓는다. 그 이유가 행복이든 신이든 힘이든 말이다.
근데 뭔가를 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친다. 목표로 세운 게 한가득인데 해놓은 건 매번 미미하다. 그 상황에 놓인 사람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불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함을 직면하는 것을 꺼려한다.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목표를 축소, 폐기하고 결국 본인이 애초에 설정한 삶의 목적과 멀어진다. 어쩌면 당장의 편안함이 본인의 삶의 목적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매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본성을 따라, 관성을 따라간다. 인간은 변화를 배격하도록 설계되어있다. 결국 혼자서 성장할 수 있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불편하게 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인격을 모독하기 위함이 아니다. 본인이 선택한 목적이 수반하는 불편함을 똑바로 볼 수 있게 곁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목적'이라고 칭하는 거창한 것들은 대부분 지속적인 불편함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머스크는 잠을 포기하면서 일을 해댔고 강수진은 발의 형체가 뒤틀릴 때까지 춤을 췄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
<위플래시>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학생의 음악적 재능을 이끌어내기 위해 극한의 방식으로 가르치는 한 선생이 했던 대사가 있다. "영어라는 언어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잘했어'다." 그저 그런 연주를 듣고 그 정도면 "잘했어."라고 한 수많은 선생들 때문에 숱한 천재들이 그 재능의 끝까지 가보지 못한다. 영화에서 선생의 교수법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보다 정확한 마찰을 일으켜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편함'이 정(正)이고, '불편함'이 반(反)이라면 '성장'은 합(合)이 된다.
사람을 흔히 그릇에 비유하지 않나. 그릇이 크다는 건 불편함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넓다는 뜻이 아닐까. 그릇을 키우기 위해 수련이 필요하듯 보다 많은 불편함을 수용하고 목적에 가까워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빨리할 필요 없다.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스스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정확한 불편함을 제공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사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에게 필요한 적확한 불편함을 곁에서 꾸준히 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부드러움이 우리를 웃게 한다면 날카로움은 결국 우리 웃음에 깊이를 더한다. 손상 후에야만 성장하는 근육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불편함을 선사할 수 있는 밤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