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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Jul 07. 2024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

240704

수영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수영복과 세면용품을 챙겨 집을 나섰다. 물 속에서 느끼는 평온함이 좋다. 물은 조용히 나를 안아준다. 그런 물 안에서 나는 더 잘 나아가보려 애쓴다. 발차기로 몸을 받치고 그 위에 팔 동작을 얹는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것처럼 스트로크 4번에 한 번씩 호흡을 한다. 숨이 가빠온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하는 것이 중요할까, 물에 있는 느낌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중요할까. 쉽게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몸을 뜻한 대로 움직이는 데 집중한다. 생각이 사라진다.


오늘은 면접이 있는 날이다. 면접관으로서 해외에 있는 회사에서 일할 인턴들의 영어 역량을 평가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면접을 보러 다닌 적은 있어도 내가 면접관이 된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같은 팀에서 일할 파견 직원 뽑는 면접에 참여한 게 다다. 오늘 면접을 보는 사람은 40명. 내 앞에 40개의 삶이 놓이고 내가 그들의 미래에 조금이나마 관여한다는 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도 지원자의 업무 역량이 아닌 영어 회화 역량을 평가하는 면접이니 대화하듯이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매일 겪는 업무를 벗어나서 새로운 일을 해본다는 게 마냥 신나는 마음이 컸다.


면접을 볼 강의실에 도착해서 동료 면접관을 만났다. 미국에서 교육학으로 박사 논문을 내시고 한국에 잠시 휴가차 오셨는데 이번 인턴 사업을 담당하는 친구가 용돈벌이로 면접관을 제안해서 오게 되셨단다. 학부 시절을 빼고는 거의 미국에서 살아오셔서 그런지 잘 웃고, 미국인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있는 분이셨다. 면접 전에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잠깐 하는데 시간 가는지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함께 영어 면접관이 된다는 건 사실 그만큼 살아온 궤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건지,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는 과정이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까먹을 정도로 즐거웠다.


마침내 면접이 시작되었다. 3~4명이 한 조가 되어 두 명의 면접관과 영어로 대화한다. 한 조 당 15~20분이 주어진다. 평가 항목은 발음/톤, 어휘, 커뮤니케이션 스킬 등이다. 이 정도가 주어진 규칙이었다.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은 완전히 자유였는데, 우리는 캐주얼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업무와 관련된 질문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면접의 흐름을 짰다. 첫 번째 조에서 자기소개를 먼저 물어봤더니, 준비된 답변으로 시작한 대학생들이 면접 시간 내내 경직되는 것을 보고 두 초짜 면접관들이 즉흥적으로 구상해 낸 방식이었다. “쉬는 시간에 보통 무얼 하나요?”, “좋아하는 영화나 책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좋아하나요?”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을 하면 학생들이 마음을 여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 다음에 “어떤 이유로 지원하게 되었나요?”, “본인 경험한 바를 인턴 생활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등 좀 더 면접 질문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전반적으로 다들 놀라울 정도로 영어가 유창한 편이었다. 상향 평준화된 지원자들 사이에서 한 끗 차이로 누군가 선발이 되고 되지 않겠구나, 인턴 영어 면접도 이렇게 어려우면 실제 입사를 위한 면접은 얼마나 피가 말릴까 싶었다. 평가 항목 다섯 가지 중에서 지원자들 간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항목은 어휘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었다. 발음이 훌륭하고 완벽한 문법으로 문장을 구성하더라도 단어 폭이 빈약해서 계속 유사한 동사를 쓴다던가 물어본 질문에 적절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핵심은 뻔하게도, 내가 생각한 바를 상대에게 잘 전달해 내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에 있었다. 본인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해 이미 충분한 고민을 해보았고 그 고민에 대한 본인만의 답을 자기 색깔을 입혀 대답하는 지원자는 드물었다.


몇 가지 안타까운 사례들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고 피면접자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는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강원도에서 온 지원자는 자기 고향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강원도에 감자가 많이 나고 다양한 종류의 감자가 있으며, 본인의 대학 때 별명이 감자였고 그래서 강원도는 과 내에서 감자 나라가 되었다고 답변했다. 내가 느꼈던 해당 답변의 문제점은 구조화가 부족하여 산개된 느낌을 주는 데 있었다.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써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말을 발화자가 하고자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그런 답변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카페에 앉아 만나서 얘기할 때는 상관없겠지만 평가를 위해 준비한 답으로는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결국 면접관이 원하는 것은 지원자로부터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답변을 듣는 것이다. 본인이 본인의 말 속에서 헤엄치다 길을 잃은 듯한 답을 원하는 면접관은 없다. 질문에 대한 주 답변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후속하는 모든 문장이 그 한 문장에 수렴할 수 있도록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문장과 문장을 쫀쫀하게 연결하여 흡사 한 개의 큰 선물을 면접관에게 줘야 한다. 포장이 되지 않은 잡다한 여러 개의 선물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다이아몬드와 흑연 모두 주성분은 탄소이지만 결합 구조로 인해 가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한 지원자는 첫인상이 똑부러졌다. 답변을 길게 늘어뜨리지 않고 할 말을 딱딱 조리 있게 하는 편이었다. 면접 중반부부터 단점이 드러났다. “어떤 이유에서 인턴십에 지원하게 되었나요?”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우선 두 가지 답변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다 끝나지 않은 채 갑자기 마무리되었다. 뒷따른 두 개의 질문에서 같은 문제점이 반복되었다. 전체적인 답변이 미완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정제된 표현이 아니더라도, 마지막 답변을 끝내려는 노력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태도의 문제다. 이런 친구에게 일을 맡기면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와서 실행한 다음 정산 단계에서 잡음이 생길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일을 끝까지 우직하게 끝내지 못해 낼 인상이었다. 상호 배타성과 전체 포괄성(MECE/Mutually Exclusive, Completely Exhaustive)은 모든 논리적인 대화에서 유효한 원칙이다. 어렵기에 지켜낸 사람이 더욱 빛난다.


반면,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지원자도 있었다.

첫 번째는 키가 큰 남학생이었다. 진지하고 과묵한 인상이라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궁금했다. 많이 긴장한 것 같아 첫 질문은 말랑한 것으로 던졌다. “좋아하는 영화나 책에 대해 말해 보세요.” 이 친구의 답은 스토아 철학이었다. 모든 것은 본인에게 달려 있기에, 통제할 수 있는 변수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살려고 한다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꼽았다. 답변이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질문이 물어보는 바를 정확하고 깊게 짚어내고 있었다. 지원 동기를 물어보았을 때는 본인이 물류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 어떤 인턴십을 했고 현재 물류 관련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으며 금번 인턴십을 통해 10년 뒤에는 국내 대기업에서 물류 전문가로서 한국의 제품이 필요한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 책임지고 운송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말의 단순함과 정확함에 나와 동료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얼마나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로 인해 나 스스로를 괴롭혀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타인의 생각과 감정 때문에 마음을 스스로 끓이고 식히며 자발적으로 고통을 선택한 게 아니었던가. 부족하고 부족하다.


다른 친구는 스펙이 완벽했다. 인턴십, 동아리, 연구, 오케스트라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였다. 거의 가장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 만큼 면접을 잘 봤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네킹 같다. 사회의 압력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깎아내며 살아온 듯한 인상이었다. 물론 면접이고 그 지원자는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수행해 냈지만, 위태로워서 금방이라도 부러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친구였다. 언젠가는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무엇이 진정 나를 위한 삶인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온다. 그 친구도 그런 시기가 오겠지, 삶을 잘 견뎌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지원자였다. 한국에서 정규 교육 과정을 거쳐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모습이라 더 마음이 아렸다. 아직까지도 내게 가장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마지막은 앞서 강원도가 고향이라던 그 학생이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은?”이라는 질문에 지원자의 답변은 수출 지원 기관에 입사하여 국내기업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마케팅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정확히 내가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내가 누군가의 10년 후구나. 내가 누군가의 꿈을 살고 있구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 앞에 검은 정장을 입고 앉아있는 지원자가 맑디 맑은 눈으로 진심을 눌러 담아 이야기하고 있는 그 꿈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의 꿈과 현실 간의 적절한 타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내 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을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매너리즘에 빠져 습관적으로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는가. 사는 게 이게 다란 말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본래 진실된 경험은 더 많은 질문을 낳는다고 했다. 40개의 삶을 들여다본 오늘, 내 머릿속엔 질문만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답은 온데간데없다. 내가 하루 종일 들은 건 답변인데. 우리 삶에서 많은 게 주어지지만 딱 두 가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일과 배우자. 나는 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충분히 만족하는가. 처음으로 사회라는 세계의 문지방을 이제 막 넘으려는 영혼들의 순수하고 불안한 눈빛들이 하나하나 내 안에 어딘가 새겨진 기분이다.


원의 시작은 곧 끝이라는데, 다시 원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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