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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Aug 19. 2024

완벽한 하루를 묻는다면

영화 <퍼펙트 데이즈> 읽기

* 본문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하루를 상상해 보자. 어떤 하루가 그려지는가. 친구들과 청록빛 해변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며 춤추고 노래하고 있는가. 혹은 봄날 햇살 아래 고요한 숲 속에서 연인과 손을 맞잡고 산책을 하고 있는가. 가족과 함께 밤의 강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에 샴페인을 곁들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도 없는 거실 창가의 소파에 누워 세 번째 읽는 책과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을 번갈아 보는 건 어떤가.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질문에 대한 답을 히라야마라는 청소부를 통해 제시한다. 히라야마의 삶은 간결하다. 이웃의 마당을 쓰는 싸리비 소리에 잠을 깬다. 면도를 하고 작업복을 입고 채비를 마쳐 집을 나선다. 문을 닫고 하늘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출근지는 도쿄 시부야 구의 17개 화장실. 점심시간에는 늘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 벤치에 앉아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는다. 그중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사이 깃드는 햇빛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퇴근하고는 사우나를 들렸다가 집 근처 역사에 있는 단골 술집에 가서 술을 한 잔 마신다. 집에 돌아와 전날 접어둔 페이지부터 책을 읽다가 이내 불을 끄고 잠에 든다. 내일도 모레도 하루의 형태는 다르지 않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평범한 하루를 히라야마는 내내 미소를 띠며 살아간다. 화장실 구석구석을 씻고 닦아낼 때도, 아침부터 갈 지자로 걷는 샐러리맨이 '청소 중' 팻말을 차고 사과 한 마디 없어도 그저 본인이 할 일을 한다. 동료 타카시가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화장실을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청소하는지 묻지만 히라야마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는 타인과 필요 없는 말을 섞지 않는다. 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자신의 고유한 리듬대로 살아간다. 실제로 관객이 히라야마의 대사를 들을 수 있는 건 영화가 시작하고 한 시간이 조금 지나서다. 그는 출근길의 하늘과 점심시간에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면서 혹은 퇴근 후 탕에 들어갔을 때나, 요란하게 언제나 같은 말로 자신을 반겨주는 술집 사장과 대면했을 때 웃는다. 하루의 찰나에서 느껴지는 행복감만으로 그는 온전히 충만한 듯 보인다.



하지만 히라야마의 평온한 일상에도 균열이 생긴다. 어느 날 가출한 조카 니코가 그의 집에 찾아오면서다. 니코는 새벽같이 일어나 삼촌과 함께 나가도 되냐고 묻는다. 그 후 둘은 며칠을 함께 보낸다. 니코는 삼촌이 듣는 6, 70년대 음악을 들으며 함께 출근하고 밀대의 물을 짜내며 화장실 바닥을 청소한다. 점심시간에는 히라야마와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고개 젖혀 나무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삼촌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한 그루의 나무라는 것도 알아챈다. 퇴근하고는 함께 동네를 자전거로 돌아다니고 삼촌의 책을 읽기도 한다.


둘의 공동생활은 주인공의 여동생이 집 앞으로 찾아오며 끝난다. 니코는 삼촌과 포옹 후 기사가 대기 중인 검은 세단에 탄다. 히라야마는 동생과 대면한다. 침묵과 어색한 말투, 경직된 동작은 둘의 단절이 짧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동생은 오빠에게 이 집에서 사는 게 맞는지, 정말 청소부 일을 하는지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는 히라야마는 동생의 눈길을 피한다. 아버지가 화제가 올랐을 때는 대답을 흩뜨린다. 대화에 대충 임하는 게 아니다. 서로 진심으로 위하는 표정이지만 둘 사이에는 오랜 세월만이 구축할 수 있는 견고한 벽이 서있다. 짧았던 만남 끝에 동생은 오빠에게 잘 지내라고 한다. 차를 타고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히라야마는 보지 못한다. 다만 고개를 떨구고 흐느낄 뿐이다. 평온함을 잃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이다.


어느새 영화는 끝에 다다른다. 마지막 출근길에서 히라야마는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 카세트를 튼다. 새로운 새벽이며 새로운 인생이라는 가사에 맞춰 해가 히라야마의 얼굴에 피어오른다. 히라야마의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히 생의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는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길게 비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내 대사가 아닌 히라야마의 얼굴에 머무는데, 이 장면에서 그의 얼굴은 기어코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된다.




진정한 수행자는 도심에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름 모를 산속에 있는 사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 또한 구도자일 수 있는 것이다. 내겐 히라야마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날 그는 모종의 이유로 도쿄에 있는 화장실을 청소하며 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듯하다. 세계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작지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 그는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함께 엄마를 찾아주고 공터 옆에 앉은 여자 사무원에게 웃으며 목례를 건네기도 하며, 타카시가 데이트해야 한답시고 본인이 아끼는 카세트를 팔자며 우길 때에도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동료에게 건넨다. 반복되는 하루에도 권태에 빠지기는커녕 본인에게 허락된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는다. 얼굴 모를 타인과 화장실 틈 사이에 꽂힌 종이로 하루씩 번갈아 가며 빙고 게임을 하는가 하면, 퇴근 후 온탕에서 코로 물 안에 공기를 내뿜어 수면이 보글보글 대는 모습을 보고 지그시 웃기도 한다.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싹튼다. 그가 세면대와 변기를 닦는 모습을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닦고(修)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일상은 도시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평범한 열흘이 나열될 때 관객에게 전해지는 메시지의 밀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힘은 영화 바깥에 있다. 일터로 나가고, 일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오는 관객의 일상이 힘의 원천이다. 출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맑은 얼굴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퇴근하면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킨다. 자야 할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시들어간다.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고 지쳐있다. 히라야마의 하루에도 그의 웃음이 말라갈 이유가 수두룩하다. 도시에서 가장 더럽다고 여겨지는 곳을 청소하는 고단함이 매일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도움으로 아이를 찾은 엄마는 히라야마의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아이의 손을 물티슈로 닦아내며 그를 책망하듯 힐긋 본다. 유일한 동료이자 대화상대인 타카시는 사전에 일언반구 없이 어느 날 일을 그만두고 그로 인해 타카시가 담당하는 화장실까지 하루 종일 청소하는 일도 생긴다. 그도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의 일원이기에 관계 속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의 리듬대로 하루를 살아낸다. 일상의 권태와 허무에 무릎 꿇지 않는다. 직분을 다하고 특유의 잔잔한 웃음을 지킨다. 타인에게 나눌 온기를 간직한다.



사람이 언어를 내려놓으면 얼마나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을까. 히라야마가 읽는 책(<야상 종려나무>, <나무>), 출근길에 보이는 건물(스카이트리), 점심시간에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는 나무 한 그루. 영화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나무는 히라야마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는 마치 자연처럼 어떠한 인위도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흑백으로 화면을 뒤덮는 일련의 잠잠한 이미지들은 나무가 꾸는 꿈 같았다. 그런 그에게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꿈을 펼치라는 사회의 준칙은 관계될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격언은 그의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는 단지 존재한다. 자신이 존재함을 홀로 오롯이 자각한다. 고개를 들어 웃는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 나서 화면을 채우는 쿠키 영상은 영화를 완결한다. 히라야마가 점심시간마다 눈으로 좇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과 그림자, 코모레비가 흑백으로 일렁인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문장을 빛은 오로지 순간에만 존재한다, 고 쓴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 것을 타이른다. 삶의 의미는 아련한 과거나 거창한 미래가 아닌 순간을 그대로 담아내는 인식에 있다. 히라야마가 살아내는 "완벽한 하루들"은 바로 그 깨달음을 현현한 의식(式)이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책에서 "결국 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나는 이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질문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였다. 삶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자신 있게 내가 이것을 위해 산다, 고 말해내고 싶었다. <퍼펙트 데이즈>는 유독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다랐다. 영화에 대한 무언가를 졸문이라도 분명히 써야만 했는데, 몇 주고 쓰이지 않았다. 부족하고, 부족하게나마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건 내가 어떤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서라기보다는,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홀로 순간의 충만함을 봐야 한다는 것. 바로 여기서 삶의 의미가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히라야마가 나무 친구의 다리 사이에서 데려온 모종이 된 기분이다.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다면 새로 태어날 것이다. 삶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은 자만이 고개를 들 때, 나는 도쿄에 사는 한 가상의 청소부를 계기로 다시 겸손을 마음에 새긴다. 일상을 보자.


보기 위해서는 비워내야 한다. 이미 가득 채워진 그릇에 더 담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히라야마가 비워낸 건 공허일까, 사랑일까 혹은 다른 무엇일까. 그의 과거 속 상실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많은 고난이 쌓였을까. 내 육신이 그를 닮아갈 때쯤에는 나도 그가 도달한 평화에 이를 수 있을까. 궁극적인 가치는 내면의 평화인가 세상을 향한 사랑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를 둘러싼 많은 관계와 옅어져 가는 요즘이다. 남을 것은 남는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보아뱀처럼 길어진다. 하늘에 닿은 검은 파도가 저 멀리서 밀려온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으려 내 발을 모래에 깊이 짓이긴다. 어둠 그 자체가 되어야만 빛이 보일 것이다. 마침내 두 눈을 들어 보고 웃고 싶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처럼 말이다.


P.S. 영화에 버릴 노래가 없다. 꼽아야 한다면 아래 노래들은 놓칠 수 없을 거다.


Nina Simone - Feeling Good

The Velvet Underground - Pale Blue Eyes (<지붕 뚫고 하이킥>, 신세경-이지훈 서사에도 나온다.)

Patrick Watson  - Perfect Day (Piano Komorebi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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