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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Jun 07. 2023

양파의 흑역사

2017년 1월 23일

* 페이스북에서는 여성독자 분으로 제한했던 포스팅입니다.      


대숲 사연이 100개 넘어가면 흑역사 쓴다고 했는데.... 음. 진짜 넘었군요. 흑역사 깝니다.      

뭐부터 이야기할까요. 어렸을 때 전 발달이 빨라서 초등학교 때 키가 지금의 키입니다. 163. 반에서 제일 컸어요. 작은 애는 150도 안 되는 반에서 저는 거인 같아 보였겠죠. 제 별명이 그때 하마, 코끼리, 기린, 뭐 그랬어요. 전 이날 이때까지도 제가 덩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거울 들여다보면 아 나 작구나 주제 파악합니다. 초등학교 끝나고 한국 떠났는데도, 작년까지도 전 제가 뚱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보통 체격입니다. 20년 동안 55~66사이 (지금은 그때보다 5킬로 더 쪘어요!). 주위에서 받은 외모 지적 - 맹하게 생겼다, 어깨빨 있다, 덩치가 산만하다, 목소리가 남자 같다 등등을 굳게 믿었습니다. 목소리 콤플렉스는 정말 엄청났어요. :D.      

성격도 지적 많이 받았죠. 드세다는 말이 제일 흔했고, 너 그래서 시집 못 간다는 협박도 흔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한국인 미용실 아주머니에게 "너처럼 공부 잘 해봐야 하나 소용없고 예쁜 우리 딸이 시집 훨씬 잘 갈 거다"란 말도 들었네요. 덕담이래 봐야 커서 좀 고치면 된다, 살만 좀 빼면 되겠다, 착하게 생겼네(이건 제가 입 열기 전에 ㅋㅋㅋ) 등등입니다.      


대학교 가서 첫 남친을 사귀게 되었는데, 저보고 예쁘다고 한 첫 번째 남자였던 거 같아요. 얘랑은 성격이 참 안 맞아서 사사건건 부딪히고 싸웠는데 얘 18번이 "나만큼 널 사랑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 사실 로맨틱한 고백 많이 했어요. 너 없으면 난 죽을 거야, 네가 내 우주의 중심이야, 너를 숭배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등등.       

제가 경험으로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만, '나만큼 널 사랑하는 남자 없을 거야'란 남자 쓰레기입니다 사귀지 마세요. 너 없으면 죽는다, 헤어지면 자살한다는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아주 잘 먹고 잘삽디다. 안 죽고 제 친구들한테 작업 열심히 걸던데요. 훤한 인물 덕에 몇 번 성공하고 저에게 자랑성 문자도 보내주더라고요.      


얘 사실 헤어지기 좀 전에 딴 여자한테 작업 걸다가 저한테 걸렸는데(아니 내가 우주 중심이라매?) 하는 말이 '네가 직장에 너무 올인해서 나를 소홀히 해서'. 어머나, 그러니까 지가 바람피운 것도 제 잘못이네요 그쵸?


흑역사 포인트1: 

이 얘기도 다른 사람들한테 쉽게 못 했어요. 그렇게 사랑한다던 남친이 바람피웠다면 그건 제가 못났다는 거잖아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그런? 

흑역사 포인트2: 

여자가 바쁘고 시간 안 내주고 하면 남자가 바람피우는 건 당연하지라고도 생각;;; 해서;; 제가 미안하다고 사과를...쿨럭. 저 어렸어요. 봐주세요.

      

전 그때 남자는 못 벌어도 돼, 내가 먹여 살릴 거야 주의였고 사실 지금도 많이 다르진 않아요. 남자가 많이 번다면 좋긴 하겠지만, '니 직장 바쁘다고 나한테 갑질할 거면 치워. 그럴 거면 내가 벌 테니까 넌 집에 있어' 주의에 가깝습니다. 너만 일하냐, 바쁘다고 생색내면서 가사 부담 불가능하면 딴 데 취직해. 난 네 뒷바라지 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스탈이 아니라서 아엠 쏴리. 그래서 저는 전남친이 돈 못 버는 거, 직장 짤리는 거 뭐 다 상관 안 했지만 


이놈은 아주 악독한 로맨티스트 종류였는데, 월급 타면 곧바로 제 선물 사고 식당 가서 다 쏘고 그 다음엔 돈이 없는 거죠. 그럼 제가 월세 내주고 생활비 대주고. 아아 흑역사.      

아마 비슷한 사람하고 친구가 되기 마련이라 그런지, 20대 초반의 제 친구들 중에 이런 애들 엄청 많았어요. 남친 먹여 살리고 직장에 출퇴근시켜주고(안 그러면 출근 못해서 또 짤리니까;;;) 밥해주고 이력서 써주고 월세 내주고 (...). 저는 한때 남친 동생까지 챙겼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저나 친구들이나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어요. 사랑한다는 건 책임진다는 거다. 얘처럼 날 사랑할 사람 없을 거다.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giver랑 taker가 있죠. Taker를 만나면 취하고 취하고 또 취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당당해요. 난 널 사랑하니까 너한테 받아도 돼. 넌 나에게 해줘야 해. 내가 힘드니까, 넌 계속 줘야 해. 넌 나보다 나은 처지니까 줘도 돼. 주기 싫은 건 니가 날 덜 사랑하는 거야. 난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넌 어떻게 날 사랑 안 할 수가 있어? 우리 만남 아무것도 아니었니?? 사람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니가 이영애냐 -_-)     

나중에 깨달았어요. 전 남친이 엄청나게 대시해서 사귄 케이스였는데, 첫 남친이었거든요. 전 그 말을 믿었어요. 날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던 후려치기가 먹혔던 거죠. 내가 얘를 정말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얘가 나를 엄청 좋아한다는 게 중요했죠.      


남친 바람 에피소드 후에도 제 직장 때문에 헤어지네 마네하고, 그 와중에 그놈은 너 없으면 죽을 거라고, 네가 바쁘니까 내가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매번 싸웠죠. 물론 얘는 로맨티스트니까 제가 직장 그만두면 어떻게 생활할 건데란 질문엔 '내가 책임질게'로 큰소리쳤습니다. 임마 내가 너 3년째 책임지고 있어;;란 말은 못 했지만 어쨌든. 3년째 12월에 저는 남친의 만류에도 아예 직장 근처로 이사가 버렸고, 직장에서 지금 남편을 처음 만났습니다. 남친은 12월 31일 저녁에 새해 전날인데 자기 동네로 빨리 와라 징징거렸고 (얘 아마 기름값 없어서 못 온다 그랬을 거에요. 약 70킬로 떨어진 곳이었음) 전 일하고 있는데 징징 짜지 마 뭐 그랬던 것 같고, 결국 엄청 싸우고 사무실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저에게 그 날 마주친 남편이 저녁 안 먹었으면 먹자고 작업 걸었네요. 그래서 그 날 남편과 저녁 먹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전화해서 딴 사람 만났다고 헤어지자고 했습니다(다시 밝히자면 그 날 저녁부터 전화 걸기까지 12시간은 양다리 걸친 거 맞습니다).     


남편과 사귀게 된 후에 잠깐 고민한 적 있어요.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나 없으면 죽는다는 남자와 내가 좋아하는 남자. 얘기 듣기로는 남자가 더 좋아해야 오래 간다던데, 이 남자는 날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전 남친처럼 '넌 내 우주의 중심'스타일의 숭배 모드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제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쪽으로, 제가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자고 결정 내렸어요. 초반에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좋아하지 않나 하는 의심 들어서 가끔씩 괴로웠는데 아이 낳으면서 완전히 두려움 놓았어요. (전 좀 이기적이었는지) 주는 사랑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이 낳고야 배웠거든요. 내 사랑에 대가가 없어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행복이라서 어쨌든 내가 좋으니까 좋더라고요. 그리고 편해요. 사랑받을까 고민 없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찾고, 그 사람이 나랑 같이 있으면 좋죠 뭐.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로 확인받으려면 내가 사랑받을만한 존재인지를 늘 의심해야 하거든요.       

흑역사를 마무리하면서 꼰대스런 조언 하나 더하자면 -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의 마음에 죄책감, 날 사랑해줄 다른 사람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나를 사랑할까, 저렇게 하면 날 싫어할까 고민하지 마시고, 그냥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 찾으셔서 맘껏,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하세요. 그 사람도 같이 사랑하고 싶어 한다면 개이득. 하지만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사랑해 줄 텐데" 이따위 사람은 폐기처분하시고요.      

예쁜 연애 하세요.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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