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습관
끝까지 쓴다는 것에 대한 희열이 있지 않은가?
중고딩 시절 모나미 볼펜으로 깜지를 채우며, 볼펜심이 닳아 더 이상 단어가 써지지 않는 그 순간, 새로운 볼펜을 쓰는 것이 아니라 볼펜심을 갈아 끼워 새로운 깜지를 채워나가는 그 기쁨이 있었다. 그 시절엔 다 그랬을까? 열 묶음씩 사서, 심지가 닳을 때까지 쓴 후 얻는 그 만족감은 내가 그만큼 열심히 공부했다는 의미와, 물건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좋은 습성이 있다라는 자기만족, 그래서 돈도 아꼈다라는 뿌듯함, 뭐 그런 것들의 조화로 은근 만족도가 높다. 연필이나 플러스펜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러한 성취감인 것이다.
[생일 선물로 받은 같은 PINK색상의 립앤칙]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수준으로 하지만, 너무 칙칙해 보이는 건 막아야겠기에 중년의 나에겐 볼터치와 립스틱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메이크업 제품이 필수템이다. 잃어버리지 않으면 끝까지 쓴다. 메이크업 제품을 끝까지 쓴다는 건, 나처럼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수준의 상대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2005년도에 친구가 해외출장 다녀온 기념으로 볼터치용 블러셔 제품을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지만, 2020년에서야 바닥을 보여, 드디어 버릴 수가 있었다고, 처음으로.... 밝혀본다. 유통기한에 덜 민감한 성격이어서인지, 그간에 피부가 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어찌 써내어서 작년에 기쁜 마음으로 새 블러셔를 구매했다.
물건을 못 버리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전엔 그런 사람이었을 수 있지만, 2015년도 어떠한 계기로 물건을 많이 버리고, 미니멀리스트라는 카페에도 가입하여 틈틈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버릴 수 있는 아이템이 있을지 둘러본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을 끝까지 쓴다는 것은 맥시멀 리스트보다는 오히려 미니멀리스트에 가깝다.
또 몇 년 정도 열심히 써서 공병이 된 케이스를 보며 흐뭇해 버리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그리고, 다 쓰지도 않았는데 잃어버리면 좀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