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 미팅으로 외국에 가면 하루에 적으면 3,4회 많으면 5,6회 미팅과 점심 및 저녁 식사 자리로 이어진다. 아시아 홍콩이나 싱가포르 비즈니스 미팅에서 기억에 남는 미팅을 꼽아보면 미팅과 함께 이어지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자리였다. 그런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미팅이 있다. 한국 고객사와 함께 유럽의 거래처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고객사인 한국 기업의 임원과 우리는 유럽의 거래처와 오전 11시로 미팅 시간을 정했다. 그리고 오후 시간을 모조리 비워달라는 유럽 거래처의 요청이 있었다. 출장 중에 짧게 만나는 다른 고객사와 달리 오전 11시부터 오후를 완전히 비우는 일정은 이례적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국 기업과 유럽의 거래처는 서로에게 나름 중요한 파트너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시에 유럽의 거래처는 사옥의 로비에서 우리를 맞았고, 간단히 차와 커피를 내주었다. 오피스를 구경하고 30분 후에 점심 식사 자리로 이동했다. 회사에서 준비한 B사(독일 B 말고)의 세단을 타고, 1시간 정도 떨어진 유럽 대도시의 외곽에 자리한 저택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을 기다리던 저택의 주인은 유럽 거래처 회사의 Chairman이었다.
Chairman은 직접 우리를 맞아 간단히 본인 소개를 했다. 그리고 그 집의 건축 연도와 양식, 설계 디자인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건물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의 역사에 대해 소개도 이어지고 비즈니스로 대화를 유도했다.
한국에서 온 4명의 방문객 그리고 같은 수로 유럽 거래처의 담당자 4명이 점심 테이블에 앉았고, 8명의 서버가 동시에 의자를 빼주는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유니폼은 아니었지만 남녀 서버는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당연히 대단한 요리가 나올 것 같았지만, 우리가 흔히 서래마을의 레스토랑이나 서울의 호텔에서 먹을 수 있는 코스요리가 나왔다. - 이쯤 되면 서울의 음식 수준, 미식도 대단한 레벨까지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고급 음식을 먹으면 유럽 어디에서도 이제는 새로운 더 특별한 식사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비즈니스 미팅을 가졌다. 원래 중요한 거래는 다 이루어진 상황이고 1년에 한 번 서로 방문하면서 얼굴을 익히는 자리가 출장인데, 그 해에는 이례적으로 chairman의 저택으로 초대된 상황이었다. 다른 연도의 미팅은 대도시의 사무실과 근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진다.
식사와 회의를 끝냈지만 오후 4시였고, 저택의 뒤쪽 숲길을 함께 걸었다. 우리가 도착한 작은 집 앞에는 8마리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온 우리 4명을 위해 말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마부가 함께 걸으며 승마를 즐겼다. 그리고 아늑한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와인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식사의 마지막으로 함께 시가를 피웠고, 피다 남은 시가를 커팅하고 이야기를 끝냈다.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 유럽의 저녁 8시에 모든 일정은 끝났고 호텔로 돌아왔다. 좋은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즐거운 이벤트로 기억되는 날이었다. 우리 일행이 한국식으로 ‘갑’님이었고, 유럽의 chairman은 을이었다. 오래전 유럽에서 경험한 접대이지만, 접대보다 환대를 받고 온 날로 기억하고 싶은 날이었다.
오래전 유럽의 접대를 떠올리며 서울의 접대를 생각해본다. 8명이 골프를 치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아니면 값비싼 고깃집에서 투뿔 한우 바베큐를 먹는다. 그러고도 ‘갑’님이 서운하지 않도록 늦은 시간까지 와인이나 비싼 술을 함께 마셔야 한다. 비용으로 생각하면, 8명 골프비 200만 원 이상, 저녁식사로 코스요리나 비싼 한우를 먹으면 200만 원 이상, 와인이나 술을 마셔도 또 100만 원은 지출해야 하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골프를 치고, 밤늦은 시간까지 식사와 저녁을 하고 다음날 출근까지 해내야 하는 극기훈련식의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접대이다.
유럽에서 그날, chairman이 부담한 비용을 추측해본다. 말은 4마리 키우고 있었고 4마리만 오후에 빌려온 것이다. 승마 저변이 넓은 유럽의 대도시에서 말 4마리 빌려오는 비용은 우리의 골프 비용보다 비싸진 않을 것이다. 아니면 옆집에서 빌려왔을 수도... 의전용 차량은 회사 소유이거나, chairman 소유의 차였다. 비용이 들지 않는다. 운전도 우리와 일하는 유럽 거래처 실무 직원들이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조리한 요리의 식재료비는 8명이어도 큰돈 드는 일은 아니었고, 와인도 저장고에서 꺼내온 chairman의 것이었다. 유일하게 비용이 발생했을 거라 생각되는 것은, 시가박스에서 꺼낸 쿠바산 시가 8개, 대충 30만 원 정도였으리라 생각된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본다. 우리가 중요한 손님에게 접대로 쓰는 비용과 비교하면, 비용 측면에선 환대라고 생각하고 말하기 어려운 금액의 지출만 있었던 날이다. 그럼에도 손님이었던 우리 일행, ‘갑’님의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두고두고 만날 때마다 그날의 시가와 승마를 이야기했고, chairman의 저택으로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일이 되었다.
비즈니스 미팅이라면 당연히 밀당이 있어야 하는데, 색다른 분위기의 환대가 이루어지면 분위기는 자연히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일행의 대표인 한국 기업의 임원은 회사를 위해 강력하게 비즈니스 협상을 해야 했다. 적어도 ‘갑’의 포지션에서 유럽의 거래처에 긴장감을 여운으로 남기는 기술도 필요했다. 그렇지만 예상하지 못한 환대 분위기에 압도당해 하루 종일 “Oh, Thank you”만 외치다 돌아왔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chairman과 직원들, 그리고 서버에게 100번 정도 말했을 것이다. 비즈니스 미팅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날이었다. 반대로 유럽의 거래처는 ‘을’의 입장에서 완승한 날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유럽의 ‘을’이 ‘갑’님을 저렴하게 KO 시켜버린 날이었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환대를 기술로 사용한 날이었다.
비즈니스에서 결국 접대는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만들어주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접대를 잘했다는 말은 극기훈련식 조기 골프와 심야 음주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비즈니스 영업활동이 아니라, 의미 있는 대화를 주고받아 상대방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는 일이어야 한다. 외교 관례에 따른 행사를 생각하면 좋다. 고급 자동차를 보내주는 것으로 의전을 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람이 사람과 이야기하며 교류하는 것이 환대이다. 해도 지지 않은 유럽의 저녁 8시에 끝난 환대가 그 어떤 한국식 접대보다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식 표현으로 ‘접대 잘했다’의 의미가 새롭게 고쳐지기를 바란다. 주말 골프로 ‘을’들의 워라밸을 부숴버리고, 간세포를 파괴하는 방식은 줄어들고 언젠가는 사라졌으면 한다. 정성을 보여주는 의전이 있고, 우리 비즈니스가 성장하는데 함께 고생한 거래처 ‘을’ 사람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유럽 국가와 도시를 언급하면, 연상할 수 있는 업종과 특정될 수 있는 한국 기업이 있으므로, 도시명과 사진, 인식 가능한 정보는 언급을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