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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김홍재 Oct 14. 2021

흑역사는 주로 공항에서

출입국 주의사항

1. 입국심사대    


그리스 아테네 공항을 출발해서 30시간 만에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로 한 이동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의 비행과 환승이었다. 긴 비행시간 때문에 꽤 지쳐 있었는데, 이제 시드니 공항만 빠져나가면 숙소로 이동할 일만 남았다. 시드니 공항 입국장은 여권 심사를 받은 뒤, 아테네 공항 발권 카운터에서 헤어졌던 두 개의 큰 캐리어를 찾을 수 있는 곳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전 세계 모든 공항을 다 가본 것은 아니지만 여권 심사를 받는 입국 심사 장소와 수하물을 찾는 컨베이어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공항이 시드니 공항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딱 붙어 있는 곳이다.


미국에 입국할 때처럼 전자 여권을 가지고 미리 등록해 두면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곳이 시드니이다. 그래서 시드니 공항에는 셀프 입국심사대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고, 한 명 한 명 셀프로 여권을 스캔하고, 앞에 달린 카메라에 얼굴을 찍으면 입국 심사는 완료. 길었던 30시간의 비행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너무 가까워서 바로 앞에 보이는 수하물을 찾는 컨베이어에 빠르게 우리 캐리어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캐리어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 나보다 뒤에 셀프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려던 와이프가 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한 채로 호주 경찰복은 입은 사람에게 끌려가는(?) 놀라운 모습이 보였다!!!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체포되기 직전 끌려가는 모양이었다. 컨베이어에 몸을 드러내고 빙빙 돌기 시작하는 캐리어를 먼저 주워야 할지. 잡혀가고 있는 와이프를 따라가야 할지 순간 머리가 ‘띵’ 했다. 당연히 와이프를 데리고 가는 경찰이 있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오랜 시간 화물칸과 공항 환승 구역을 거쳐 나오는 캐리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얼른 주워야 하는 마음인데, 다른 나라 공항에서 어디론가 체포되어 가는 와이프를 먼저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큰일일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와이프는 공항 저 안쪽 구석, 경찰들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뭘 꺼내서 보여주고 있었고, 질문과 대답이 여러 번 오고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출입 제한임을 알려주는 대기선 뒤에 있어야 했고,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히 호주는 처음 간다는 와이프의 말부터 이런저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에 호주를 방문했다가 벌금을 낼 만한 상황을 저지르고 출국해버려서 입국 거부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가방 속에 물건들을 의심받고 특별 심사 및 수색을 당하는 일은 아닌지. 혹시라도 뭐가 잘못되어 입국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호주 경찰에 체포되는 것은 아닐지. 기다리는 몇 분 동안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몇 분 뒤 다행히 와이프는 풀려났지만, 기다리는 동안 멀리서 봤을 때는 꽤 많은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와이프는 뭔가 부끄러운지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많이 당황했었는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컨베이어를 여러 바퀴 돌고 있던 캐리어를 주워 들고 벤치에 앉고 나서야 와이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여권을 스캔하고 카메라에 얼굴 사진을 찍었는데, 스크린에    


“사용할 수 없는 여권입니다. 별도의 심사가 필요하니 안내에 따르라...”

라는 메시지가 떴다고 했다.    

순간 바로 뒤에 제복을 입은 사람이 붙었고, 따라오라고 해서 따랐다고 했다.


내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여권 스캐너와 카메라였는데, 와이프가 사용했을 때만 인식 오류가 생길 리 없었다. 와이프가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간 이후에도 같은 셀프 심사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사히 통과하고 있었다. 여권도 그리스 아테네에 입국하고 출국할 때도 아무 문제없이 사용했던 여권 그대로였다.


뭔가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분명한데, 와이프가 금방 풀려난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와이프는 여권을 꺼내 보여주면서,     


“내가 이 사진이랑 그렇게 다른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여권 사진 속에서 옅은 미소를 띤 완벽한 모습의 ‘그녀’는 지금 내 앞에서 웃고 있는, 30시간의 비행으로 지친 ‘리얼’ 와이프와 완전히 다른 ‘환상 속의 그대’였다. 긴 여행을 하면서 여권 사진을 꺼내 볼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와이프의 '리얼'이 여권 속의 ‘그녀’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와이프를 무안하게 만든 시드니 공항의 카메라와 여권 스캐너는 스스로 성능에는 문제가 없고 정확하게 '다른' 사람이라고 판정했다고 말해주었던 것 같았다.


여권 사진 속의 완벽한 ‘그녀’는 사진을 찍던 날, 평소보다 조금 진한 화장을 했으며, 환한 조명과 약간의 포토샾 기술은 조그만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하게 완벽한 사진을 2차원의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요즘은 미술과 예술의 영역에 AR이나 VR 같은 과학 기술이 총동원할 수 있는 세상이다. 화장, 조명, 사진 기술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들을 총결집시켜 와이프를 ‘환상 속의 그녀’로 만들 수 있긴 하지만, 시드니 공항의 카메라와 스캐너는 너무 많은 화장과 기술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우리는 30시간의 비행을 했으며, 이번 사건의 원인이 인천 공항에서 발생하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렸다. 아테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인천 공항으로 한 번의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지친 상태였다. 와이프는 비행기를 환승하기 위해 들어온 인천공항의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에서 샤워는 처음이라며 신기해하며 즐겼던 라운지 샤워가 문제였다.


샤워 후에 비행기가 인천 공항을 출발하던 시간은 저녁 18:40분이었고, 밤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 공항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기내에서 잠자고 먹으면서 굳이 화장을 할 이유가 없는 시간대였다. 그리고, 시드니 공항의 성능 좋은 카메라와 여권 스캐너에 그녀는 딱 걸려버렸다.

     

당시 와이프를 공항 구석으로 데려갔던 시드니 공항 직원은 ‘Young ladies’에게 종종 발생하는 일이라며 안심시켜 주었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슷한 사건은 재발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기만 할 것이다. 편리한 전자식 셀프 입국 심사대는 점점 더 많은 공항에 보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권 사진을 찍을 때는 화장을 적당히 줄여야 할지. 아무리 긴 비행이라 해도 셀프 심사대를 거치는 경우에는 다시 화장을 손봐야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시드니 공항 직원의 말처럼 종종 발생하는 일이 되어 앞으로 많은 ‘Young ladies’를 당황시킬 것이다.    




2. 출국심사대    


싱가포르로 출장을 앞두고 한동안 만나지 못할 친구들이 모여 주었다. 늦은 밤까지 모여 술을 마시는 친구들과의 아지트였다. 단골이었던 서울 공덕동 뒷골목의 이자까야는 출입문 옆에 야키토리가 맛있게 구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큰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 앞에는 야외에서 간단히 음식을 올려두고 먹을 수 있는 선반이 있다. 여름이면 그 선반에 앉아 야외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되는 자리이다. 출장을 떠나기 전 그날은 한겨울이었고, 이자까야 내부에서 술을 먹다가 종종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면서 소주를 마시곤 하는데 소주병과 소주잔을 들고 잠시 그 선반으로 나왔다. 선반에 기대어 술을 마시고 나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담배 때문이다. 때문에 밖에 나갈 때면 코트를 어깨 위에 덮었고, 내부로 들어가면 다시 벗어 두었다.


금요일 밤에 모인 친구들은 싱가포르로 출장을 가면 한동안 만나지 못할 나를 위해 늦게까지 함께 해주었고 새벽까지 술자리는 이어졌다. 자주 다녀오는 싱가포르여서 주말에 별다른 재미있을 일도 없고, 더위에 취약한 내 체질을 잘 아는 친구들이어서 퇴근하면 매일 호텔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을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의 배려라고 생각되었다.


다음 날 아침, 서너 시간 자고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코트 위에 노트북을 넣은 백팩을 메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숙취가 있는 아침이었지만 탑승권을 받고 늦지 않게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주섬 주섬 노트북을 꺼내고 백팩과 코트를 검색대 위에 올려두었다. 검색봉이 다가올 때, 두 팔을 벌려 앞 뒤로 문제없음을 확인받았다. 검색대를 통과하면 편의점에 들러 숙취해소 음료나 시원한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검색대 직원이 나를 부른다. 코트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 보이라고 했다. 담배와 라이터가 나왔고, 라이터 한 개는 반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시 코트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다른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이 문제를 일으켰다. 해외 출장으로 비행기를 자주 타는 편이지만 공항 검색대에서 물건을 압수당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날카로운 물건이나 위협이 될만한 물건은 기내에 휴대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그 물건은 결국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했다. 문제의 그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기내 반입 금지 물품이면서 압수 대상이었던 그 물건은,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의문의 ‘소주잔’이었다. 왜 소주잔이 코트 주머니 속에서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날 밤에 이자카야 밖에 나가서 마시던 소주잔을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넣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고는 만취 상태로 잠들고 겨우 공항으로 기어 왔으니, 주머니 속에 소주잔이 들어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기내에 반입할 필요가 없는 유리잔은 휴대하실 수 없습니다.’    


검색대 직원의 친절한 말투로 안내를 받았다. 기내식으로 소주를 주지 않으니 소주잔은 기내에서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것처럼 소주를 기내에서 주는 경우가 있더라도 내가 직접 소주잔을 기내로 들고 가야 할 이유는 없으니 반박 불가의 상황이었다. 검색대 직원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고 의문의 소주잔을 휴지통에 버렸다. 더 큰 문제를 만들지 않아 다행인 상황이다.


검색대에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소주잔을 두고 그런 안내 멘트를 해야 했던 공항 직원도 당황했었던 것 같다. 소주잔은 반입 금지임을 알려주던 친절한 멘트의 끝에 참지 못한 웃음을 분명히 보았다. 술이 덜 깬 상태로 두 팔을 벌려 부스스하게 검색대에서 붙잡혔던 30대 남자의 문제 상황을 재빠르게 간파하고 (비)웃음으로 이해해주던 친절한 검색대 직원이었다. 술이 덜 깬 상태로 비행기를 타러 가던 날의 큰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그 이후로 공항 검색대에서 두 번 다시 소주잔이 나오는 일은 (아직) 없었지만, 출국장 검색대에 물건을 꺼내 놓기 전에, 공항으로 가는 공항 철도 안이나, 택시에서 주머니에 이상한 – 검색대 직원이 웃음을 참게 할 만한 – 물건이 나오지 않도록 한 번 더 주머니 속을 뒤져보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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