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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김홍재 Sep 19. 2021

비행기 타기 좋은 계절은?

업그레이드를 노려보자

<Question> 다음 중, 비행기를 타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1. 봄

2. 여름

3. 가을

4. 겨울,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사지선다형 질문이니, 몰라도 한 번 찍어보자. ‘5. 정답 없음’ 같은 사기는 치지 않기로 약속한다.


여름?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비행기를 주제로 에세이를 쓴 작가인데, 출제자의 의도가 그렇게 쉽게 읽히고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난이도 ‘중’ 이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제일 많은 계절이기는 해도 ‘여름’은 아니다.


주로 여름에 휴가로 비행기를 타긴 하지만 사실, 여름은 비행기 타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제일 많아도 그게 정답이 아니거나 다 좋은 게 아닐 때가 있다. 안 그래도 더운 여름에 탑승구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활주로 가운데에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날도 있는데, 활주로의 뜨거움에 엔진 열기까지 더해지는 여름이 비행기 타기 좋은 계절이 될 수는 없다.


여름에 출장을 떠나야 한다면, 옆자리에는 휴가로 들뜬 다른 승객들이 많다. 더워도 일하러 떠나야 하는 출장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승객들이 제일 많은 시기가 여름이기도 했다. 가족 단위 휴가 여행객들이 많고, 비행기 소음이 싫은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미취학 고객님들이 제일 많은 계절이기도 하다.


그럼 여름에 휴가로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의 마음은 가볍고 즐겁기만 할까? 그것도 아니다. 휴가지에서 보낼 시간을 생각하면 좋은 계절이지만, 비행기를 타기에 좋은 계절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일부 항공사는 여름에는 성수기도 모자라, ‘극성수기’라는 이름으로 사악한 요금의 티켓을 판매한다. 좌석을 꽉꽉 채우기만 해도 즐거워할 항공사가 폭증하는 계절적인 수요를 이유로 극성수기 요금이라니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게다가 휴가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 동반이니 비행기표 가격도 만만치 않고 휴가지 리조트의 가격은 왜 갑자기 오르는지. 여름은 비행기를 많이 타는 계절일 뿐, 가장 좋은 계절은 아니다.    

 

그럼 반대로 겨울일까? 겨울은 비행기표가 싸고, 아무래도 아기들이 덜 타는 계절이기는 해도, 기온차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든다. 한겨울에 싱가포르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날 새벽 공기는 무서웠다. 35도에 육박하는 기온의 싱가포르를 떠나 밤새 비행하고 인천공항버스 승강장에서 새벽에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날, 바깥 기온은 영하 20도까지 내려가 있었다. '감기 걸리세요.'라며 55도에 이르는 일교차가 겨울의 이른 새벽에 인천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내 심장을 따끔거리게 만든다.     


봄이나 가을일까? 날씨는 적당하지만, 긴 휴가를 내기 어렵고, 출장이 제일 많은 시기이니, 비행기와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어려움이 있으니, 답은 ‘5. 정답 없음’이어야 하는데 분명히 사기는 안치기로 약속했었다.


그럼 정답은. ‘겨울’이다.     


사실 비행기를 타기 좋은 계절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비즈니스 클래스 업그레이드 확률이 가장 높은 계절은 있다. 결국 비행기를 타기 좋다는 건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에 앉아야 되는 일이다. 문제는 잘 알다시피 돈이다.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을 ‘내돈내산’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비즈니스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노려보기로 한다. 아니면, ‘옆그레이드’도 노려볼 만하다. 비즈니스 클래스 업그레이드가 높은 계절? 구글신도 답을 모르고, 녹색창을 여러 번 두드려도 답을 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 확률이 높은 계절’ 이런 통계가 있을 리 없다. 내돈내산으로 비행기표를 샀던 경험으로 정한 정답. 내가 정한 답, 즉, 뇌피셜이다.


여름이나 날씨 좋은 봄, 가을과 달리, 겨울에는 비행기 탑승률이 떨어진다. 비행기에 빈 좌석이 많은 계절이다. 정확하게는 이코노미 좌석을 사도 비즈니스 클래스 업그레이드 확률이 더 높은 이코노미 비행기표를 겨울에는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이코노미 항공권이면서, 업그레이드 확률이 높은 이코노미가 있다. 이코노미 티켓 중에서 진골, 성골 이코노미 티켓을 가린다는 말이다. 같은 이코노미 좌석이라도 등급이 있는데, 몇만 원 더 비싼 이코노미, 즉 마일리지 적립률이 100%인 항공권을 말한다. 겨울에는 몇만 원만 더 내면 살 수 있다. 여름에는 같은 이코노미여도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는 ‘정상’ 항공권이었으니까.


마일리지 적립률이 70%, 50%, 30%로 떨어지거나, 모아둔 마일리지를 사용해도 좌석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한 이코노미 항공권이 있는데, ‘할인항공권’이나 ‘땡처리’라는 별명을 가진 티켓이다. 100% 마일리지가 적립되는 진골 이코노미보다 싸기 때문에 선택한다. 항공사에서 업그레이드해 줄 승객을 고를 때 당연히 가장 후순위가 된다. 겨울에는 몇만 원만 더 내면, 100% 마일리지 적립이 되는 진골, 성골 이코노미를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 그러면 업그레이드되는 확률이 실제로 높았다.      


아무리 신분이 진골 이코노미급으로 올라가도 태생이 이코노미라, 항상 업그레이드를 노릴 수는 없다. 이럴 때 용기, 아니 철판을 한번 써보자. 탑승권을 받는 공항 카운터에서 “혹시 업그레이드 부탁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어보자. 이코노미 티켓을 사들고, ‘비즈니스 클래스 내놓으라’는 말이다. 부끄럽겠지만 미리 경고했었다. 철판을 써야 한다고. 그러면 겨울이라 빈 좌석이 많이 남았을 때, 100% 적립되는 진골 이코노미 티켓임을 확인하고, 카운터 직원은 모니터를 보고 키보드를 다시 두드린다. (국내 공항 카운터 한국인 직원들의 타이핑 속도가 최고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외국 공항의 카운터에서는 인천공항 카운터 직원만큼 빠른 키보드 타이핑을 볼 수 없었다.)     


될까?

생각보다 자주 업그레이드가 된다. 철판이 필요하고, 몇만 원의 투자, 도박이 필요한 지점이다. 같은 도박이라도 빈 좌석이 많은 겨울이라야 확률이 높아지는 유리한 도박이 된다. 태생이 이코노미 티켓이니 비즈니스 좌석 안 준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공짜 업그레이드가 안 되는 날이라도 대신 100% 마일리지를 적립하면 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를 위한 마지막 찬스가 아직 한번 남았다.


광화문에서 술에 절어 영업 다니며 열심히 살던 어느 날, 헤드헌터를 통해서 싱가포르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싱가포르 재보험회사에서 한국인 언더라이터, 쉬운 말로, 영업 사원을 자리를 제안받았다.

면접을 보려면 싱가포르 ‘래플스’라는 동네에 가야 하는데, 바쁜 연말이라 휴가를 낼 수 없었다. 원래 이직을 위한 면접은 몰래 추진해야 하는 것이라 면접 날짜를 잡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두근두근 짜릿한 일이다. 싱가포르에서 면접을 보려면 이틀의 휴가가 필요한데, 바쁜 연말에 이틀 휴가를 내는 순간 동료와 상사의 의심을 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면접관, 채용이 결정되면 상사가 될 사람, 그리고 그 상사의 상사에 더해 싱가포르 지사장과 인터뷰이다. 주말에 면접을 보자고 역제안을 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호텔과 비행기표를 줄 테니 휴가를 내고 일정을 잡자는 면접 제안이었다.


고심 끝에 ‘무박 2일’ 싱가포르 면접을 결정했다. 하루만 휴가를 내면 되는 일이다. 새벽에 인천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오후에 면접을 보고, 친구와 저녁을 먹고 밤 비행기를 타면, 다음날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바로 출근하면 되는 스케줄이 나왔다. 몰래 하루를 출장도 휴가도 아닌 면접을 위해 잡은 비행 스케줄이다. 회사 옆자리 동료와 상사가 모르게 비행기를 타고,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밤 비행기로 새벽에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출근하는, 장소와 화면 이동이 슉슉 넘어가면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첩보영화의 비밀요원이 된 것 같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밀 유지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친구와 면접을 본 회사의 상태에 대해서 묻고 답하며 맥주를 마시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취기가 오르고, 배는 부르고, 컨디션은 망가져버렸다. 공항이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일단 공항으로 와서 비행기를 탔다.


무더운 싱가포르와 달리 비행기 객실의 온도는 타자마자 기침이 나올 정도로 시원했고, 기침에 이어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노이즈 캔슬레이션 헤드폰과 안대와 담요로 무장하고 필사적으로 잠을 청했다.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공항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했던 건 아닐까. 인천공항까지 6시간이나 남았는데 비행기에서 죽는 건 아닐까.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컨택트 렌즈를 빼고 다시 앉았지만, 기침 소리는 더 커지고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약을 챙겨 오지 않아서 걱정이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안대를 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천사 같은 목소리로 누군가 나를 부른다. 꿈일까? 아니 아파서 잠도 안 오는 상황이다. 천사 같은 승무원의 목소리다! 승무원이 나를 깨웠다!     


“고객님~”

“괜찮으신가요?”

“불편해 보이시는데 편한 좌석으로 모셔도 괜찮을까요?”     

“Okay Lah”.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없다.

(‘Okay Lah’는 싱가포르식 영어, 싱글리쉬. ‘Okay’를 ‘Okay Lah’라고 대답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승무원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다리를 뻗고 편하게 잘 수 있는 비상구 좌석일까..., 그런데 커튼을 열고 다시 앞으로 앞으로...,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천사 말고, 하늘 위에서 진짜 천사를 만났다 !!!


내가 비행기에서 죽으면 뒷감당을 하느라 승무원도 고생하게 될 텐데 그걸 방지하려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천사의 마음으로 승무원이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려는 선행이자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출근을 해야 할 죽어가는 승객을 위한 소생술이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2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6시간 비행 중에 4시간만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을 수 있었던 ‘옆그레이드’ 수준의 행운이었지만, 덕분에 남은 4시간 동안 숙면에 들 수 있었다. 새벽에 도착한 12월의 인천공항은 영하 20도에 가까웠지만, 공항버스를 타고 출근까지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승객이면서 동시에 환자가 되거나, 혹은 환자로 보이면, (((혹은, 보일 수 있으면))), 마지막 찬스이자 환자 찬스, 업그레이드에서 조금 모자란 ‘옆그레이드’라도 받을 수 있다. 빈 좌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비행기의 빈 좌석은 겨울에나 가끔 볼 수 있는 일이니, 겨울은 비행기 타기 좋은 계절이다. 진골 이코노미 좌석의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작가의 뇌피셜이지만, 정답은 4번, ‘겨울’이다. 아프면 확률이 더 올라가고, 진골 이코노미 좌석을 사면 여름보다는 확률 높은 도박을 할 수 있는 유리한 계절이다. 그리고, 철판도 잊지 마시기를. 진골 이코노미 티켓으로 비즈니스 업그레이드를 받는 날, 작가를 한 번 생각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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