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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slee Feb 03. 2022

"살아있는 동안은 삶의 존엄성을"

'동그람이:동물 그리고 사람이야기' 에 연재된 글입니다.

그동안 수지를 키우는 반려인의 입장에서만 오스트리아 소식을 전하다 문득 다른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다.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수지와 다를 것 없는 동물이지만, 다른 목적으로 태어나 평생을 다른 운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축’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축’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푸른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 진흙탕에서 시원하게 뒹구는 돼지, 앞마당을 뛰어다니는 닭이 떠오른다. 일상적으로 마트에서 사는 고기나 우유의 포장에 그려진 이미지들이 바로 이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축산 제품’들을 구입할 때 포장 속 이미지로 가축이 살아왔으리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구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는 확연히 다르다.

무게가 곧 가격이기 때문에 빨리 살을 찌우는 것이 목표인 소와 돼지, 좁은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 안에서 ‘산란 기계’로 살아야만 하는 닭까지…. 가축이 ‘식품’이 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뒤, 한동안 고기를 먹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수십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은 육식에 적응됐고, 과거의 채식 열풍과는 달리 최근에는 채식이 건강에 딱히 이점이 없다는 연구 결과들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달걀을 낳는 산란계들이 좁은 배터리 케이지에서 밀집 사육되고 있는 모습.

‘동물복지 선진국’ 오스트리아 역시 가축의 목적을 인정하고 있다. 같은 포유류여도 반려동물(Tier)과 가축(Nutztier)은 구분된다. 물론 오스트리아 동물보호법은 포유류 뿐 아니라 조류, 파충류는 물론이고 곤충까지 생명을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명의 권리’와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삶의 권리’를 규정해 보호하고 있다. 이런 규정 하에서 가축의 삶은 어떨까?

오스트리아는 정부뿐 아니라 시민들 역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그 중심에는 ‘유기농 산업’이 있다. 아무리 작은 슈퍼마켓이라도 유기농 제품을 판매할 정도로 유기농 상품이 보편화됐을 정도다. 특히 어린이 식품은 유기농이 아닌 제품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유기농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동물복지형 축산’이다.

동물복지형 축산은 오래전부터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대두됐다. 유럽연합(EU)에서는 2012년부터 조류의 배터리 케이지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동물복지형 축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지, 살아있는 동안 동물이 경험하는 모든 부분이 동물복지형 축산의 기준이 된다.

오스트리아는 일찍이 동물복지형 축산을 지향해왔다. 오스트리아의 동물복지형 축산 농장 인증인 ‘비오(BI0) 인증’을 받기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많은 농가들이 이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돼지의 경우 전체의 1%, 닭 15%, 소 20%, 양 28%, 염소 52%가 '비오 인증'을 받은 농장에서 공급된다.

축산 농가가 비오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토지부터 검증을 받아야 한다. 최소 2년간 화학 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땅에서 가축을 길러야 한다. 또한 동물들은 규칙적으로 방사돼야 한다. 예를 들어 젖소는 1년 중 120일 이상 방사돼야 한다. 축사 안에서도 묶여서 살면 안 되고, 오직 35도 이상의 기온일 때만 안전을 위해 묶어둘 수 있다. 질병에 걸렸을 때도 먼저 대체요법으로 치료해야 하며, 항생제 투여는 수의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항생제를 투여받은 뒤에는 투여 기간의 두 배의 기간 동안 이 농장에서 생산된 축산물은 판매할 수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뒤에도 매년 농장은 당국의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비오 인증 농장은 오스트리아 전체 농장 중 18% 정도이며 그 수는 매년 늘고 있다. 

다만 돼지농장의 경우 비오 인증을 받은 농가가 단 1% 수준인데, 이는 돼지농장이 전부 공장식 축산으로 운영된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비오 인증을 받기는 매우 까다로운데 돼지농장 대부분은 항생제 투여 조건 등 일부가 맞추기 어려울 뿐 다른 부분은 비오 인증 조건에 맞춰 운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국내의 식품 및 유통 업체도 ‘동물복지형 축산’과 발맞추고 있다. 유통 업체 ‘호퍼’는 ‘페어 호프’(Fair hof)라는 철학을 표방하며 공정한 방식으로 사육하고 있는 농가들과 거래하고 있다. 호퍼에서 요구하는 축산 농가의 동물복지 기준은 까다롭다고 소개한 오스트리아의 비오 인증보다 높은 수준이다. 심지어 도축 직전까지 차량 이동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축산농가와 도축장의 거리를 50km 이내로 제한할 정도다.

공정한 농가와의 거래, '페어 호프'를 표방하는 식품 유통 업체 호퍼(Hofer)의 홈페이지. 호퍼가 농가에 요구하는 동물복지 수준은 비오 인증보다도 높다.

물론 오스트리아 시민사회는 여기에서 만족하고 있지 않다. 오스트리아의 동물보호단체들은 돼지농가의 60%가 판자형 바닥을 채택하고 있고, 이는 돼지가 살고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물보호단체들은 돈사의 바닥을 전부 짚으로 교체하자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돈사의 판자형 바닥의 모습.(왼쪽) 오스트리아 동물보호단체들은 60% 정도의 돼지농가에서 이와 같은 바닥을 채택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전면적으로 바닥을 짚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유럽을 휩쓸었고 한국에도 최근 발병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체코, 헝가리 등에서 크게 발병했지만 오스트리아까지는 ASF가 번지지 않았다. 당국의 방역 조치가 철저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방역을 철저히 한다고 해도 야생 멧돼지, 인접국과 공유하고 있는 다뉴브강 등 ASF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변수는 많다. 어떻게 오스트리아는 ASF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오스트리아 축산 전문 웹사이트 란트샤프트레벤(Landschfftleben)은 비오 인증 농장과 ASF 발병에 대해 의미 있는 가설을 제시했다. ASF는 낮은 온도에서는 전염성이 낮은데 비오 인증 농장처럼 자연적 환경에서 지내는 돼지들은 신선한 공기 아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감염 위험이 낮아진다는 가설이었다. 또한 란트샤프트레벤은 자연 상태에 가깝게 지낼수록 면역력도 높아지는 것 또한 ‘농장의 자체 방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도 말했다. 철저한 방역 조치와 까다로운 비오 인증 농장이 함께 힘을 발휘하는 오스트리아의 사례를 잘 연구한다면 ‘지속 가능한 축산’의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을 먹는 일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먹는 대상인 가축이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존엄성을 지켜주자는 오스트리아 사회의 인식은 단순히 이상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ASF처럼 치사율 100%의 질병이 닥쳤을 때, 질병이 더 번지지 않기 위한 대응책은 살처분뿐이다. 살처분은 죽는 동물뿐만 아니라 시행하는 사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일이다.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식탁에 오를 시간까지 동물의 존엄한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글·사진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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